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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마고 Mar 25. 2017

내 딸이 나를 살렸다

내 딸 평화가 나에게 준 것

삶이 아득한 정체기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 같던 위험한 순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국을 떠났던 작년 4월을 기억한다. 사무실에서든 편집실에서든 집에서든 온 몸이 타오르듯 고통스럽던 날들을 혼자 견디어낸지 반 년이 다 되어갈 때쯤이었다. 뒤에서들 수군덕거린다 한들 어쩔 수 없었던 처신을 반복했다. 사람에게 울며 매달렸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믿지 않았다.

집을 떠나 한 달을 보내고 –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놓쳐 경유지인 헬싱키에서 뜻하지 않은 천국을 맛 보고 – 돌아갈 때 나는 이미 예전의 나와는 달랐다. 하지만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을 때부터, 나는 다시 예전의 고통스러운 나로 다시 돌아갈까 하는 두려움에 서서히 사로잡혔다.

일 년에 두 달은 집을 떠나 살아야 하는 강박적 노마드로 살거나, 전혀 다른 분야에 종사하거나, 어떻게든 삶의 무게중심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그 변화의 수단들 중 하나이던 ‘유전자 합치기’가 가장 먼저 성공’되었다’. 아기가 우리에게 왔다. 스페인에서 집에 돌아온지 한 달도 되지 않던 시점이었다. 한 생명의 잉태를 어떠한 것의 수단으로 설명하는 것이 께름칙할 때가 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는 단순히 새로운 생명이 찾아왔다는 사실 외에도 내 삶이 어떤 식으로든 변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기뻐했던 것 같다. 그래도 어쨌든 난 엄마가 되고 싶었다. 정확히 ‘엄마’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고 남편과의 특별한 세상을 더 다채롭게 만들고 싶다는 식으로 사고했던 것 같긴 하지만.

실제로 임신은 불과 1년 전쯤의 고통스럽던 나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법 하도록,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도록 하는 훌륭한 전환 수단이 되어주었다. 출산 후 아기를 돌보며 지낸 한 달은, 1년 전 내가 겪던 고통을 공허하게 만들어주었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던 언젠가의 공상을 실현한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의 행복은 오로지 우리로부터 나온다. 외부의 요인에 두 손 모아 빌거나 굴복하지 않는다. 세상의 시간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아기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것 외의 일시적 쾌락은 언제까지고 유예시킬 수 있으니까.


주위  ‘어머니’들의 “한 번 겪어봐라 다시 배에 넣고 싶을 거다, 자아가 사라진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싶다, 아무리 평등한 부부관계라도 아기 나오면 전통적 성역할에 준한 역할수행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될 거다” 등등의 위협(?)은 아직까지 사실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내가 결혼을 해서 행복하다 말할 때처럼, 사람들은 나에게 또 이렇게 말하겠지. "아직은 괜찮아, 더 지나 봐." 우리는 이렇게 타인의 삶을 함부로 넘겨짚는 유부남녀들의 무례함을 딛고 7년을 지냈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고통스러운 날이 우리에게 오게 될까? 만일 그렇더라도, 이 작은 삶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변하게 되더라도 온 몸이 타오르고 내장의 표피세포가 다 벗겨지던 그 고통의 시절에 찾아온 나의 아기를 나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내 딸이 나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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