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구에 온 목적이 뭐지?"

신생아 언어 습득기

by 딥마고

조리원에서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기를 돌보는 방법에 대해 교육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고 간호사마다 가르치는 내용이 다르다며 역정을 내면서 글을 썼었다. 아래는 그 일부.


2/28 (출산 후 6일이 지난 시점) 여러 명의 교육자가 여러 명의 피교육자를 상대로 동일한 범주의 내용을 가르치는데 내용이 통일되지 않으니 피교육자들은 나름대로 아기와 본인의 개성을 고려해서 자기의 길을 찾아야 한다. 디테일한 모유수유 자세부터, 한 번에 몇 분 정도 물려야 하는지, 유축은 한 번에 몇 분 해야 하는지, 유축을 많이 하면 좋은지 나쁜지, 붓기 뺀다고 호박을 먹으면 젖양이 줄어드는지 그렇지 않은지.
교육이라는 걸 길잡이를 해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여러 길을 보여준 후 스스로 맞는 길을 찾게 해준다는 의미라면 이렇게도 시도하고 저렇게도 시도하는 게 괜찮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여러 케이스를 모두 파악하고 있고 이렇게 다양한 전례와 길이 있으니 너와 네 아기에 맞는 걸 택하라고 하는 것과, 10명도 넘는 사람이 각기 확신에 차 이 길이 맞다고 이리 끌고 저리 끌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
그러니까 이런 시설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산모를 교육해서 집에 보내는 건 좋은데, 그러려면 일관성 있는 커리큘럼을 갖추든 산모와 간호사를 일대일로 붙이든 혼란을 줄일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라는 거다.


글을 쓴지 한 달여가 흘렀다. 딸 평화와 나는 그 사이에 수많은 신호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 관계를 진척시키고 있다. 아, 실은 평화가 일방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내가 진땀을 흘리면서 파악하기 바쁘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시도 때도 없이 젖을 찾던 아이는 어느 새 한 번 먹고 나면 3시간을 거뜬히 버티어주는 효녀가 되었고, 그 3시간 사이에는 우리 세 가족이 번갈아서 노는 패턴이 완성되었다. 평화가 자면, 우리 부부가 논다. 평화가 놀면, 우리 둘 중 하나는 평화가 놀다가 짜증나지 않도록 말도 걸어주고, 들었다 놨다 올렸다 내렸다 한다. 그러면 나머지 하나는 논다.


위의 글을 썼을 때 물론 나는 편치 않은 몸과 집과는 전혀 다른 환경, 낯선 이들과 얼굴 마주치며 생활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예민해져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가장 큰 문제는 아기를 대하는 나의 접근방식에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나는 얼른 내 손에 잡힐 만한 '정답'을 원했던 것이다. 젖을 먹이는 일,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 아기를 달래는 일 등을 그야말로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로 간주한 것이 아닌가 싶다. 회사에서 업무를 볼 때처럼, 백지 위에 리스트를 작성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분류해내고, 결론을 도출하는 식으로 딱 딱 떨어지고 뒤끝이 개운한 그런 일 말이다. 다양한 노하우에 귀를 기울이고 소화하고 선별해낼 만한 여유가 당시 나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예, 아니오로 똑 떨어지는 알고리즘이, 아기라는 혼돈에 부여할 질서가 필요했다. 아기를 바라볼 때면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나서 아기에게 꼭 내 존재를 각인시켜주고 싶었던 것인지, 잘해내고 싶다는 조급함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평화가 운다 -> 기저귀를 체크했는가(예, 아니오) -> 밥 먹을 때가 되었는가(예, 아니오) ->...... 이런 식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를테면, 모유수유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그랬다. 아기가 한 번 젖을 물면 10분 이상 빨지를 않았다. 나 때문이었다. 내가 수유하는 동안 확실하게 '아기가 젖을 먹고 있다'는 느낌을 스스로에게 주기 위해 가슴을 쉬지 않고 마사지했기 때문이었다(젖양이 많은 나는 마사지가 과도한 사출로 이어져 아기가 놀라 울다가 그만 먹는 경우가 있었다). 또 내가, 아기가 젖을 한 번 물었다가 완전히 떼고 나면 '아, (일이) 끝났다'고 느끼고 다시 물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론 내가 가슴을 펌핑해주지 않아도 젖은 잘 나오고 있었고 한 번 입을 뗐다고 해서 아기가 배가 부르다는 뜻도 아니었다. 배에 공기가 차서 트림을 시켜주면 다시 물고 조금 더 먹는 경우도 많고, 잠에 들었다가 깨워보면 조금 더 먹고 더 깊은 잠을 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아기를 돌보는 일이란 회사에서 기획 문서나 편집해야 할 촬영본을 대할 때처럼 선형적으로 처리하고 다시 뒤돌아보지 않는 '일'과는 다른 것이었다. 평화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감정과 감각이 살아 있는 나의 딸이다. 체온과 숨을 주고 받으면서 교류해야 할 나의 아이인 것이다. 시간을 들여 평화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를 헤아리고, 내가 제공하는 손길에 평화가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합을 맞추어야 했다.


가만 들여다보고 또 귀를 기울이니, 상황과 때에 따라 평화의 울음은 각양각색으로 서로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우리 집 고양이가 놀아달라고 요구할 때와 자기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울음 소리가 다르듯, 또 우리가 정확히 그 소리들을 구분해내듯이, 평화의 울음과 표정도 그런 것이었다. '배가 고파요'가 가장 쉽고, '졸려요' '안아주세요' '흔들어주세요' '기저귀가 축축해요' '더워요 혹은 답답해요' '아파요' 등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면서 엉뚱하게 알아듣고 잘못된 대응을 해주는 횟수도 줄어들고 있다. 이건 꼭 영화 <컨택트>의 언어학자 루이즈처럼 시행착오를 거쳐 새로운 세계의 언어를 배워가는 것 같아서 흥미롭고 보람차다. 새로운 언어 습득은 나의 아기를 더 디테일한 차원에서 보살피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놀아주고 - 이를테면 오늘은 놀아달라는 평화의 요구에 흔들거나 바운서에 눕히는 대신에 화장대 거울 알전구를 환하게 켜주고 그 앞에 앉혀주었다. 그리고 함께 거울셀카를 찍었다 - 나아가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돌아보면 아기 돌봄뿐 아니라, 논리적으로 대할 필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수많은 일들을 그런 식으로 대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과의 이벤트, 모임을 계획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 친구와 대화를 하는 일(반드시 생산적이거나 어떤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 건 아니다). 방송국 안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도 업무의 영역에 속하지만 리스트를 만들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분류하는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나는 내 손에 익숙한 나만의 리듬을 만들고 타인의 그 어떤 노하우도 배제해둔 채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았고 그래서 몸과 마음을 혹사시켰고 그래서 너무 빨리 타 버려(burn-out) 공허해진 것은 아니었던가.


모든 것이 내 질서 안에 머무르기를 원해서 청소하는 동안의 잠깐의 혼돈도 반가워하지 않는 나에게 세상을 비뚜루 보는 엉뚱한 창의성은 올 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열등감을 넘어 물론 이제는 chaotic한 창의성 대신에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는 나만의 색깔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육아라는 사안을 대할 때 정갈함만을 추구하다가는 평화를 억압하는 양육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질서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질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주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2010년 5월부터 남편이 나에게 가르치고 있는 '사랑'이 아니던가. 조리원에서 쓴 위의 글은 '육아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답을 알아채기 전에, 아직 제대로 된 사랑을 줄 준비가 되어 있기 전에 조급하게 느낀 불만에서 발로한 것이었다.


아기를 낳고 기르는 일은 이렇게도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어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회색 구강기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