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딥마고 Mar 27. 2017

"지구에 온 목적이 뭐지?"

신생아 언어 습득기

 조리원에서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기를 돌보는 방법에 대해 교육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고 간호사마다 가르치는 내용이 다르다며 역정을 내면서 글을 썼었다. 아래는 그 일부.


 2/28 (출산 후 6일이 지난 시점) 여러 명의 교육자가 여러 명의 피교육자를 상대로 동일한 범주의 내용을 가르치는데 내용이 통일되지 않으니 피교육자들은 나름대로 아기와 본인의 개성을 고려해서 자기의 길을 찾아야 한다. 디테일한 모유수유 자세부터, 한 번에 몇 분 정도 물려야 하는지, 유축은 한 번에 몇 분 해야 하는지, 유축을 많이 하면 좋은지 나쁜지, 붓기 뺀다고 호박을 먹으면 젖양이 줄어드는지 그렇지 않은지.
 교육이라는 걸 길잡이를 해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여러 길을 보여준 후 스스로 맞는 길을 찾게 해준다는 의미라면 이렇게도 시도하고 저렇게도 시도하는 게 괜찮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여러 케이스를 모두 파악하고 있고 이렇게 다양한 전례와 길이 있으니 너와 네 아기에 맞는 걸 택하라고 하는 것과, 10명도 넘는 사람이 각기 확신에 차 이 길이 맞다고 이리 끌고 저리 끌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
 그러니까 이런 시설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산모를 교육해서 집에 보내는 건 좋은데, 그러려면 일관성 있는 커리큘럼을 갖추든 산모와 간호사를 일대일로 붙이든 혼란을 줄일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라는 거다.


 글을 쓴지 한 달여가 흘렀다. 딸 평화와 나는 그 사이에 수많은 신호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 관계를 진척시키고 있다. 아, 실은 평화가 일방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내가 진땀을 흘리면서 파악하기 바쁘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시도 때도 없이 젖을 찾던 아이는 어느 새 한 번 먹고 나면 3시간을 거뜬히 버티어주는 효녀가 되었고, 그 3시간 사이에는 우리 세 가족이 번갈아서 노는 패턴이 완성되었다. 평화가 자면, 우리 부부가 논다. 평화가 놀면, 우리 둘 중 하나는 평화가 놀다가 짜증나지 않도록 말도 걸어주고, 들었다 놨다 올렸다 내렸다 한다. 그러면 나머지 하나는 논다.


 위의 글을 썼을 때 물론 나는 편치 않은 몸과 집과는 전혀 다른 환경, 낯선 이들과 얼굴 마주치며 생활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예민해져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가장 큰 문제는 아기를 대하는 나의 접근방식에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나는 얼른 내 손에 잡힐 만한 '정답'을 원했던 것이다. 젖을 먹이는 일,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 아기를 달래는 일 등을 그야말로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로 간주한 것이 아닌가 싶다. 회사에서 업무를 볼 때처럼, 백지 위에 리스트를 작성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분류해내고, 결론을 도출하는 식으로 딱 딱 떨어지고 뒤끝이 개운한 그런 일 말이다. 다양한 노하우에 귀를 기울이고 소화하고 선별해낼 만한 여유가 당시 나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예, 아니오로 똑 떨어지는 알고리즘이, 아기라는 혼돈에 부여할 질서가 필요했다. 아기를 바라볼 때면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나서 아기에게 꼭 내 존재를 각인시켜주고 싶었던 것인지, 잘해내고 싶다는 조급함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평화가 운다 -> 기저귀를 체크했는가(예, 아니오) -> 밥 먹을 때가 되었는가(예, 아니오) ->...... 이런 식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를테면, 모유수유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그랬다. 아기가 한 번 젖을 물면 10분 이상 빨지를 않았다. 나 때문이었다. 내가 수유하는 동안 확실하게 '아기가 젖을 먹고 있다'는 느낌을 스스로에게 주기 위해 가슴을 쉬지 않고 마사지했기 때문이었다(젖양이 많은 나는 마사지가 과도한 사출로 이어져 아기가 놀라 울다가 그만 먹는 경우가 있었다). 또 내가, 아기가 젖을 한 번 물었다가 완전히 떼고 나면 '아, (일이) 끝났다'고 느끼고 다시 물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론 내가 가슴을 펌핑해주지 않아도 젖은 잘 나오고 있었고 한 번 입을 뗐다고 해서 아기가 배가 부르다는 뜻도 아니었다. 배에 공기가 차서 트림을 시켜주면 다시 물고 조금 더 먹는 경우도 많고, 잠에 들었다가 깨워보면 조금 더 먹고 더 깊은 잠을 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아기를 돌보는 일이란 회사에서 기획 문서나 편집해야 할 촬영본을 대할 때처럼 선형적으로 처리하고 다시 뒤돌아보지 않는 '일'과는 다른 것이었다. 평화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감정과 감각이 살아 있는 나의 딸이다. 체온과 숨을 주고 받으면서 교류해야 할 나의 아이인 것이다. 시간을 들여 평화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를 헤아리고, 내가 제공하는 손길에 평화가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합을 맞추어야 했다.


 가만 들여다보고 또 귀를 기울이니, 상황과 때에 따라 평화의 울음은 각양각색으로 서로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우리 집 고양이가 놀아달라고 요구할 때와 자기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울음 소리가 다르듯, 또 우리가 정확히 그 소리들을 구분해내듯이, 평화의 울음과 표정도 그런 것이었다. '배가 고파요'가 가장 쉽고, '졸려요' '안아주세요' '흔들어주세요' '기저귀가 축축해요' '더워요 혹은 답답해요' '아파요' 등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면서 엉뚱하게 알아듣고 잘못된 대응을 해주는 횟수도 줄어들고 있다. 이건 꼭 영화 <컨택트>의 언어학자 루이즈처럼 시행착오를 거쳐 새로운 세계의 언어를 배워가는 것 같아서 흥미롭고 보람차다. 새로운 언어 습득은 나의 아기를 더 디테일한 차원에서 보살피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놀아주고 - 이를테면 오늘은 놀아달라는 평화의 요구에 흔들거나 바운서에 눕히는 대신에 화장대 거울 알전구를 환하게 켜주고 그 앞에 앉혀주었다. 그리고 함께 거울셀카를 찍었다 - 나아가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돌아보면 아기 돌봄뿐 아니라, 논리적으로 대할 필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수많은 일들을 그런 식으로 대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과의 이벤트, 모임을 계획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 친구와 대화를 하는 일(반드시 생산적이거나 어떤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 건 아니다). 방송국 안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도 업무의 영역에 속하지만 리스트를 만들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분류하는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나는 내 손에 익숙한 나만의 리듬을 만들고 타인의 그 어떤 노하우도 배제해둔 채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았고 그래서 몸과 마음을 혹사시켰고 그래서 너무 빨리 타 버려(burn-out) 공허해진 것은 아니었던가.


 모든 것이 내 질서 안에 머무르기를 원해서 청소하는 동안의 잠깐의 혼돈도 반가워하지 않는 나에게 세상을 비뚜루 보는 엉뚱한 창의성은 올 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열등감을 넘어 물론 이제는 chaotic한 창의성 대신에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는 나만의 색깔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육아라는 사안을 대할 때 정갈함만을 추구하다가는 평화를 억압하는 양육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질서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질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주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2010년 5월부터 남편이 나에게 가르치고 있는 '사랑'이 아니던가. 조리원에서 쓴 위의 글은 '육아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답을 알아채기 전에, 아직 제대로 된 사랑을 줄 준비가 되어 있기 전에 조급하게 느낀 불만에서 발로한 것이었다.


 아기를 낳고 기르는 일은 이렇게도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어준다.


  

매거진의 이전글 회색 구강기 가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