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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마고 Mar 17. 2017

산후조리원에서 TV를 보다

과거로 돌아가다

3/1


TV를 틀었다.


남편 "저런 막장드라마 보지 말고 책이나 좀 읽어라."

아내 "나 책 많이 읽거든?"

남편 "그래?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누군데?"

아내 "섹-스피어. 이름이 아주 맘에 들어"

(야릇한 음악이 흐른다)

남편 "으이그, 됐거든?"

아내 "나도 싫거든? 내가 매일 보는 책! 가계부나 좀 봐봐. 계속 잔액이 마이너스로 늘어나고 있어."

(남편, 죄책감 느끼는 표정)


근 10년 만의 채널 재핑. 전업주부 비하, 고민하지 않은 고정된 캐릭터,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는 여성을 대놓고 무시하는 공중파 드라마. 5분도 못 보고 껐다.


결혼생활은 저렇게 서로를 무시하고 서로에게서 매력을 찾지 못하는 권태로운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부추기지 않았으면 한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말하며 결혼해서 행복하다는 말을 의심하는 사회가 어떤 이들을 다치게 한다는 것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극 중 남편은 어쩌다 휴가내어 집에서 쉬는데 회사가 본인 없으면 안 돌아갈거라며 회사에서 연락 오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다는 설정은 더욱 경악스럽다. 일하지 않는 날도 일에 매어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 그리다니. 저들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저런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사는 내 세상에서는 대사 하나 행동 하나 가시 같이 불편하다.




3/2


조리원에서의 어쩔 수 없는 TV 재핑은 과거로 돌아간 듯한 신기한 느낌을 준다.


TV를 거실에 두지 않고 본방사수하고 싶은 프로그램만 다운로드해 보고, 가뭄에 콩나듯 TV방에서 보는 습관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부부가 유달리 다른 놀 것을 좋아하는 탓이기도 하다. 생산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건강한 강박과 새롭지 않은 것을 견디지 못하는 유별남으로, '진짜' 삶을 살고자 하는 탓이다. 입 벌리고 세뇌 당하는 대신에 능동적으로 찾아 소비하는 삶.


미디어의 헤게모니가 TV에서 온디맨드 영상이나 모바일로 옮겨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육아에 좋은 환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질이 좋지 않은 콘텐츠를 아이가 무분별하게 접할 가능성만 적절히 차단해주고, 스스로 관심 가는 것을 찾아 탐색하는 습관을 길러주면, TV 세대인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면서 자랄 수도 있다.


어제 공중파 드라마를 본 충격의 여파가 생각보다 오래 간다. 몇 년전만 해도 촌스럽다고만 생각했지 문제의식을 가지지는 않았던 드라마 내용이 페미니즘 이후로 문제적으로 느껴지고, 이 똥 같은 걸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가는 아이가 덜 멋진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분별한 인풋이 아니라 취사선택해서 취향을 개발할 수 있는 미디어 소비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최적의 환경은 어떻게 만들어주면 좋을지 남편과 함께 차차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이런 글을 쓰는 나는 엄밀히는 아직 TV 매체에서 일을 한다. 그러나 플랫폼은 유동적이다. 나의 정체성은 '방송국에서 일하는 피디님'이 아니라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콘텐츠 메이커로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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