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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마고 Mar 18. 2017

신생아는 뱀파이어

남편의 타락죽은 나의 위장을 거쳐 아기의 입으로


3/5

조리원 간식으로 매일 밤 여러 종류의 죽이 나오는데, 가장 좋아하는 것이 타락죽이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한 타락죽을 먹어본 일은 없지만 보자마자 그리고 먹자마자 앗 이것은 타락죽이다-라고 알아챘다. 맛있다, 이게 제일 좋아. 뭘로 만든 거지? 우유+쌀... 음... 하고 음미를 하면서 어떤 죽보다도 느리게 먹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났으려나, 평화는 자기 침대에 누워 있고 나와 남편은 우리 침대에 서로가 서로의 몸이 내 것인양 엉켜 누워 있었다. 남편이 말했다.

"만들기 엄청 쉽대."
"뭐가?"
"타락죽."
"(!) 그 사이에 타락죽 어떻게 만드나 찾아봤어?"
"예사심슨이 맛있다고 했으니까."

남편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갓난아기처럼 내 품에 파고들었다. 이런 순간들이 점처럼 모여 우리의 7년을 완성한다. 앞으로의 7년도, 그 후의 70년도, 이런 반짝이는 순간들이 그 모양을 결정할 것이다.


3/8


오늘 새벽 수유를 하는데, 수유실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버스커 버스커의 '여수밤바다'가 나왔다. 바다에 가고 싶었다. 지금 나와 배를 맞대고 쌕쌕거리면서 젖을 물고 있는 이 작은 친구와.

몇 시간이 지나고 칭얼대는 평화를 안아올려 나도 모르게 '여수밤바다'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번도 따라부른 적은 없던 노래다. 사실 몇 번 '앞다리가 쏙 뒷다리가 쏙 팔딱팔딱 개구리됐네'를 부르면서 스스로 이게 지금 자장가로서 적합한지를 의심하곤 했었기 때문에 새벽에 '여수밤바다'를 들은 것이 괜찮은 전환 기회가 됐다. 직접 불러보니 단순하지만 서정적이고 가슴 속 뭔가를 탁, 하고 건드려주는 것이 과연 대중적으로 성공할 법 했구나 생각했다.

잠든 평화 얼굴을 보면서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거리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바닷가에 남편과 내가 있고 평화가 우리 주위를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상상되어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기를 갖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구나, 생각하는 스스로를 조금 신파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벅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평화와 함께 바다를 걷고 싶다. 1cm 작은 세포 덩어리에 불과했던 네가 자라나고, 넘어졌다가 일어나고, 친구를 사귀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는 모습을 함께 하고 싶다.

아기를 낳고 길러내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뭉클해진다. <면역에 관하여> 저자 율라 비스는  수유를 하는 과정에서 아이가 나의 몸에서 액체를 빼내어 생명을 채운다는 생각 때문인지 뱀파이어를 자주 연상했다 말한다. 모유수유를 하는 엄마는 그 열량소모 덕에 체중이 빠르게 주는 반면 아이는 오로지 그 액체 하나로 살아가며 - 모유를 먹는 아이는 따로 다른 것을 먹을 필요가 없고 심지어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 -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오른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뱀파이어를 떠올리는 게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생명을 유지한다는 이야기는 환상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출산 후에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여성의 몸엔 젖이 돌고, 아기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아서 젖을 물고 빤다는 것이 환상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배고플 때 젖꼭지를 입 근처에 가져다대면, 아기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새처럼 작은 입을 벌리거나 벌써 쩝쩝 거리면서 뭔가를 빠는 시늉을 한다. 이 모습이 웃기고 귀여워서 웃은 적이 몇 번인지. 평화가 태어난지 딱 2주, 웃기고 귀여운 짓을 하루에 10번씩 12번씩 한 덕에 이제 볼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몸무게 증가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평화가 훌쩍 커서도 내가 이 아이를 생각할 때 코 끝이 시큰하다면, 그건 젖을 먹이고 자장가를 부르는 지금의 기억 때문일지 모른다.

(다만 몇 번이고 '여수밤바다'를 부를 것 같진 않다. 마치 스포티파이를 켰을 때처럼 어떤 곡이 가장 적합한지 계속 찾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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