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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마고 Mar 19. 2017

우리는 모두 자궁 안을 기억하고 있다

아기는 어른이 내린 시간과 공간의 정의를 뒤엎는다.

3/7

운이 좋아 회복속도가 빠르고 수유의 조건도 잘 받쳐주어 아기를 돌보는 일이 점점 손에 붙고 있다. 집에 가면 다른 세계가 펼쳐질 수는 있겠으나 어느 정도는 헤쳐나갈 수 있겠다 싶게끔 패턴이 잡혔다.

피디 대선배가 아기를 돌보다 보면 내 부모가 날 이렇게 키웠겠구나 하고 기억 저편에 있던 순간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고 하셨었는데, 그 말 때문인지 너무 빨리 그런 순간이 와버렸다. '에미야 나를 안아 배 안에 있을 때처럼 흔들어라' 신호가 오면 안아서 흔들어주는데, 몇 분 지나고 나면 말도 안 되는 느낌이 찾아온다. 그러니까 엄마 품에서 내가 흔들리던 기억이 난다. 올려다보던 엄마 가슴께, 향긋하던 냄새, 머리칼에 선선하게 바람이 들면 잠이 온다... 온다... 왔다. 슈우우- 하는 백색소음. 적당한 흔들림. 졸리지 않을 때도 자게 되는 환경. 고속버스를 타고 거의 모든 승객이 잠든 것을 볼 때마다 생각하던 문장.


"우리는 모두 자궁 안을 기억하고 있다."




3/12


평화는 평균 한두시간마다 배가 고파진다. 전에 먹은 밥이 성에 안 찼다 싶으면 40분 45분만에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잠에 취하거나 기분이 좀 나면 3시간 가까이 자기도 한다. 그래봤자 3시간을 넘기는 일은 없다.

사정은 밤에도 마찬가지여서, 쪽대본처럼 그때 그때 나누어 한두 시간을 자고 일어나 젖을 물려야 한다. 꼭 배가 고플 때가 아니어도 아기는 울기 마련이기 때문에 아기 엄마 아빠들은 잠을 제대로 못 자 퀭한 얼굴로 출근한다는 건 거의 상식이다. 신생아일 때가 가장 힘들고, 아기가 커갈수록 아기가 오래 자고 수유 텀이 길어지면서 덜 힘들어진다(고 한다).

'신생아 밤중수유'라는 검색어로 여러 부모의 고민이 잡힌다. 모유수유를 하든 분유를 먹이든 계속 깨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노하우를 주고 받는 글들이 많다. 밤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그 중 남편이 어느 시간대를 맡아주고, 번갈아 자고, 몸이 덜 축나면서 지혜롭게 육아를 분담하는 법.

조리원에서 나온지 하루만에 우리도 우리의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조리원에서도 밤 12시쯤부터 두세 텀만 쉬었지 새벽 4-5시에 수유를 시작했기 때문에 몸도 그 패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함께 "예전 여자들은, 아니 아직도 독박 쓰는 여자들은," 으로 시작하는 탄식을 내뱉는다. 아기에만 집중하고 있어도 진이 빠진다. 여기에 남편 '출근시키고', 밥 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모든 가사노동을 해야한다고? 그리고는 '집에서 논다'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도, 아기를 아내에게 맡겨버린 어떤 남자들에게도,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거란 것. 아기는 시간을 빨리 가게 하는 힘이 있다. 아기가 밥 먹는 10-20분은 쏜살같이 지난다. 아기가 잠을 자서 우리가 자유로이 무언가 할 수 있는 1시간은 더 빨리 지난다. 일찍부터 깨어 있을 수밖에 없어서 남들보다 하루가 길지만, 아기와 함께 있어 남들보다 하루가 짧다.

평화가 잠을 길게 자기 시작하면 우리는 전보다 덜 힘들겠지만, 평화가 태어난지 19일 된 오늘, 2017년 3월 12일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3.5kg가 넘어버린 평화가 다시 작아져 태어났을 때처럼 3.08kg가 되지는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가는 게 아깝다'던 우리 언니의 말, '눈을 감으면 눈꺼풀에 딸이 보인다'던 지인의 말이 어떤 말인지 정확히 알 것 같다. 그래서, 임신기간 매일 11시까지 자고 일터 지각도 밥 먹듯 하던 내가, 눈을 번쩍 번쩍 뜬다. 새벽 3시, 5시, 6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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