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딥마고 Mar 05. 2018

육아 1년, 기록으로 빛나다

아기를 낳고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얻은 것들

“육아라는 게 원래 지루함의 연속이잖아.”


어제, 쌍둥이 아들과 딸 하나를 둔 우리 언니가 지나가는 말로 그런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일종의 쾌를 느꼈다. 육아는 고된 육체노동이자 전쟁이며 기싸움이고 정보싸움이기에, 나처럼 느린 호흡으로 사는 사람은 아주 잘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지루함’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반갑게 다가왔던 것이다. 명쾌하게 육아는 지루하다고 선언해주니 그 동안 육아의 복잡다단한 본질과 측면에 대해 여기저기 설명하던 나의 노력이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지루함’이야말로 육아의 고단함을 정확하게 꼬집은 단어일지니.


그래, 육아는 지루하다!


이 말을 했으면 될 걸, 나는 복잡하게 이렇게 얘기하고는 했다. “아기와 함께 있을 때는 아기를 주시하고 안아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몸은 occupied 되어 있는데 뇌는 비어있는거야. 인풋이 없으니까, 놀고 있는 귀로 뭐라도 습득하려고 팟캐스트를 미친 듯이 듣는데 그마저도 아기한테 책을 읽어주거나 음악을 들려줄 때는 들을 수가 없어.”


돌이켜보면 아기와 함께 있는 게 지루하다고 말을 하면 왠지 아기에게 미안해지기도 하거니와 한가로워 보이고 ‘집에서 노는’ 것처럼 비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나 역시 아기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이제 나에겐 끝도 없는 시간, 오로지 시간만이 주어졌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오히려 더 그 편견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놀지 않는다’는 강박은 육아휴직 초창기에 유독 열성적으로 읽어들인 책들과 시청한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증명하고 있다. 아기가 잠든 밤 9시부터 밤 12시 1시까지의 몇 시간이 여전히 우리 부부에게 꿀 자유시간인 것도 엄연한 사실이라, 매일 갖던 이 밤 시간이 복직 후에 없어지면 내가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인정해야 한다. 평화를 처음 만나 아침마다 눈을 부비며 설레는 마음으로 아기를 안으러 뛰어갔던 그 때도, 육아는 지루한 것이었다. 아기에게 영양을 주고 위생을 관리해주고 감각을 일깨워주는 것 이외에 내가 얘랑 단둘이 또 할 수 있는 게 뭘지 매일 생각을 했다. 오늘은 또 어딜 가나. 거기 가 봤자 돈만 쓰는데. 카페 가 봤자 10분 이상 못 있을 거고. 아 정말 너무 책 읽고 싶다. 아 음악도 팟캐스트도 이제 지겹다. 아 스마트폰으로 기사 읽고 싶다. 아 영화관 가고 싶다. 넷플릭스 정주행하고 싶다. 이어폰 꽂고 산책하고 싶다.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고 싶다...


나의 지루함은 기어코 다큐멘터리 제작, 글쓰기, 독서토론, 사회활동 등 여러 딴짓들로 발전하는 한 편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기록하는 습관을 수반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들 사이에서 아기의 성장을, 내 생각의 변화를, 사회의 변화를,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꼈던 순간을 붙잡아두어야 했다. 그렇게 벌써 1년이 지나고, 평화의 평화로운 생일이 지날 즈음 나는 방송국 피디가 아닌 엄마이자 아내, 프로딴짓러이자 생산강박증 환자로서 살아온 1년 동안의 이야기를 담은 나만의 책을 만들었다. 박근혜 탄핵으로 시작해 미투 운동으로 마무리되는 책. 헬조선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기와 남편의 손을 잡고 용케 살아남은 한 여자의 하루 하루를 담은 책. 여기에 내 지루함 1년치가 쌓여 있다.


그 책을 읽고(?) 있는 딸 평화
그 책을 읽고 있는 남편
내용 일부. 거의 매일 일기 형식으로 사진과 함께 기록했다.

남편은 거의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정도로 집중해서 이 책을 읽었다. 아마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재미에, 본인이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된 묘함이 더해졌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에는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평화의 신생아 시절과 우리 부부가 나누었던 대화까지 꼼꼼하게 묘사되어 있다. 평화가 뒤집기 시도를 하루에 몇 번이나 했는지, 옹알이 발전은 어떤 단계를 거쳐왔는지, 그 날은 왜 내가 아팠으며 어디가 어떻게 힘들었는지도. 그뿐 아니라 세상이 구석구석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책과 대화와 경험을 통해 실감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적혀 있다. 이렇게나 많은 것을 꼭 손에 잡히는 형태로 남기고 싶었을까, 책의 두께를 보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많은 부모가 아기가 태어나면 사양이 좋은 카메라부터 산다고 하는 걸 보면, 아기가 자라나는 하루 하루가 아쉬운 것은 나만의 감정은 아닌 것 같다. 내 스마트폰 사진첩도 아기의 사진과 영상이 9할을 차지한다. 한데 사진과 영상 외에 드래프트로라도 글로 기록을 남겨두니 순간적으로 들었던 느낌도 어느 정도는 사유의 형태로 정리가 되어서 좋았다. 일기장에는 사유의 원형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적극적으로 꺼내고 싶은 화두로 변모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모성애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분리불안이나 세대갈등, 본격적인 가사노동의 허무함 혹은 즐거움, 각 성별이 갖는 특징(있기나 한건가? 100% 사회화된 건 아닐까?)과 사회에서 강요하는 성역할의 인과관계 같은 것 말이다.


먼저 가사노동에 대해서 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온 세상이 가사노동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왔다는 데 적잖이 놀랐고 여전히 놀란 상태다.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와 <집 안의 노동자>와 같은 좋은 책들이 생각 확장에 도움을 주었다. 지난 1년, 나는 프로페셔널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어쨌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스스로 집안 관리를 해야 한다’는 당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새로운 사실들. 1) 이 노동은 매일 아주 조금이라도 수행해야 하지만, 해 봤자 ‘티가 안 난다’. 안 하면 티가 나고. 2) 이 노동은 여느 노동과 마찬가지로 소질이 있는 사람이 따로 있고 체계와 전략을 필요로 한다. 3) 심지어 이 노동을 요리, 설거지, 청소, 빨래, 정리정돈, 육아 등으로 세분화하고 나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각 세부적인 노동은 서로 다른 자질을 요하기 때문이다. 4) 그 중에서도 육아는 다른 가사노동과 동시에 처리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누군가 전담해야만 하는 특별한 일이다. 사실 육아의 지루함은 다른 종류의 가사노동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으나, 아는 사람은 안다. 아기가 잠들지 않는 한 육아와 다른 가사노동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5) 그러나 우리 세대가 오기 전까지 (혹은 아직도) 인류는 가사노동을 특정 성별이 해야 하고 개인의 특성과는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가사노동을 태어날 때부터 잘한다고 생각해왔다.

남편이 엘리베이터에서 옆집 노부부를 만났다.
지난 번 제주도 가는 길에 할배를 마주쳤던 터라 여행에 대해 물었다고.
- 그래, 지난 번 제주도는 잘 갔다왔나?
- 네 장인 장모님이랑 다녀왔어요.
- 허허, 왜 부모님이랑은 안 가고 처가랑만 가나?
- 지난 설에 저희 집에서만 있었거든요.
이제 펀치라인.
- 왜, 밥 못 얻어먹을까봐 처가에 그렇게 잘 하나?
- (딥빡) 아뇨, 저희 밥은 서로 해주는데요. 처가에 잘하는 게 뭐 잘못 됐나요?
남편은 ‘빻은’ 할배라며 이 대화를 전했다. 우리 부모 세대에게 ‘처’는 아직 ‘공짜로 밥해주는 사람’이다.


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강박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한 때의 느낌으로 흘러가버렸을지도 모를 생각들. 그냥 좀 불편한데 왜 불편한지 누가 말해줘야만 깨달을 수도 있었던 첨예한 문제의식들. 이런 것들이 한 데 모여 새로운 가능성이 되어주었다. 생각의 언어화는 사유로, 사유는 또 다른 독서로, 독서는 또 다른 독서로 이어졌고, 사회와 가정이 돌아가는 방식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선사했다. 이 지루한 1년으로부터, 나는 내 앞에 놓여 있는 수많은 갈래길을 확인했다. 서는 곳이 달라지니 풍경은 전혀 달랐다. 회사의 방향에 발맞춘 직장인 신분에서 한 발짝 떨어진 나는 내가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지를 다시 확인했고, 회사 바깥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회사에서 배운 게 무엇이고 세상의 어떤 지점을 가장 못 견뎌하고 바꾸고 싶어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육아휴직을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하기로 했을 때 너무 오래 현업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을 비쳤었다. 평화가 돌잔치를 했는데도 아직 휴직기간이 두 달이나 남아있으니 확실히 짧은 기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시점에 내가 확신하는 바는, 30대에 쉼표를 찍는 1년은, 물론 경제적 정신적 여유와 육아의 행복, 여기에 틈새 시간을 오롯이 내 것으로만 채우고자 했던 강박증과 기록의 힘이 뒷받침이 된 결과겠지만, 그 어떤 업무의 성취보다 알찬 열매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


단, 지루함을 견뎌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84년생 김지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