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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마고 Sep 02. 2017

84년생 김지영

미시적인 것들의 의미 - 사적인 역사

“시간이 지나면 마고 씨의 삶이 하나의 사례로 회자될 거예요. 그러니까, 자료로 남는 사람이다ㅡ 이렇게 나와 있어요.”

 임신임을 확인하고도 잘 믿기지가 않아 내가 엄마가 될 거라는 사실을 곱씹고 있을 때, 왜 하필 점성술사의 말이 자꾸 떠올랐는지 잘 모르겠다. 벌써 수년 전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재미 삼아 보았던 별자리 점이었다. 탄생일시의 별자리 배치를 보고 성향과 운명을 무려 2시간 가량이나 이야기해준다는 선생님은, 컴퓨터 별자리 프로그램에 내 생년월일을 입력했다. “84년...0월..0일…”



 내 삶의 어떤 부분이 특별하여 자료로 남는다는 것일까?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내 평탄한 과거에서 특별히 사람들이 기억할만한 부분은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 외국어에 호기심을 갖던 나에게 엄마는 외교관이 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어린 나는 세계를 누비면서 사는 상상을 했다. 물론 그 상상 속의 나는 혼자였지, 곁에 배우자나 자녀가 있지는 않았다. 중학생이 되자 공부로 반에서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던 아이들은 나를 포함 모두 여학생이었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 때쯤 바이올린 연주와 흑인음악에 꽤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는데, 엄마는 내가 음악을 전공하기에는 성적이 아깝다고 했다. 나는 공부를 잘하면 음악보다 더 재미있고 훌륭한 것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줄로 알고, 고등학교 때 바이올린을 관두고 공부에만 집중했다.
 
 나와 내 주위 여자친구들은 남자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강요를 받았고, 부모 세대가 보기에 음악보다 더 대단하고 중요한 일을 할 거라는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일은 단지 남들이 아는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만을 뜻했고 그게 어떻게 음악보다, 다른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의 젠더가 그 기대에 조금이라도 누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방송국에 입사하고 나서도 자기 자리에서 멋지게 활약하는 많은 선후배 여성 PD들을 보며 일했고, 스스로의 젠더에 관한 한 자존감도 굳건히 유지했다.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 날 전까지는.




 2016년 5월, 강남역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이후 내 또래의 많은 여성들이 일상 속에서 여자라서 겪은 부당한 일에 관한 증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증언들을 듣고 읽으며 의식의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과거의 몇 장면을 길어올렸다. 그러자 이따금 소름이 돋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장면 1. 내가 좋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엄마의 말.
 “아휴. 고추만 달렸으면 완벽한데. 왜 엄마 뱃속에 떨어뜨리고 나왔어. 달고 나오지.”
장면 2. 사춘기가 시작되던 10대 초반, 소파에 널부러져 있는 나를 본 아빠의 말.
 “기집아가 자세가 그게 뭐냐 이 놈아. 다리 오므려.”
장면 3. 조연출 시절, 촬영장에서 덩치가 큰 남자 후배와 함께 있을 때. 굳이 말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내가 아닌 그 남자 후배를 더 중요한 결정권자로 짐작하는 수많은 관계자들.

 이중잣대, 고정된 성 역할의 강요, 모두가 침묵하는 성희롱, 권고사직 당하는 임산부들.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읽으면서 그간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여기던 바닥 문화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여성 선후배가 많은 것은 사실 그리 위로삼을만한 통계라고 할 수 없었다. 평사원에서는 반반을 이루던 성비가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9대1로 수렴한다든지. 철두철미한 일처리는 남성의 경우 꼼꼼하다는 칭찬으로, 여성의 경우 기가 세고 무섭다는 비난으로 돌아온다든지. ‘짬밥’ 순으로 하자. 너 오늘 왜 그렇게 꾸미고 왔어? 아직 치마 입고 다닐 연차는 아니지 않냐? 군인을 흉내내며 명예남성이 되어야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남성적 문화라든지.

 이제 알았다. 나의 삶이 자료로 남을 거라던 점성술사의 말을 왜 내가 임신을 확인했을 때 떠올렸는지. 철야 회의와 밤샘 편집을 밥먹듯 하는 이 직종에서, 갑자기 체력도 창의력도 아닌 성별이 한계로 작용하기 시작한 역사적인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아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직원이 남성일 경우엔 축하한다는 말뿐이면서, 여성일 경우엔 아기는 어떻게 키울 거냐고 묻는 사회를 정면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아기를 낳고 복직을 앞둔 지금, 일과 가사와 육아를 남편과 어떻게 분담해서 해쳐나가는지에 따라 우리 후세대 남녀 모두의 삶이 크게 달라질 거라는 걸, 그래서 내 삶 뿐 아니라 내 세대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자료로 남을 거라는 걸, 생각이 짧은 나는 임신을 확인한 순간에서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디 엄마이자 직업인으로서의 나의 삶이 긍정적인 자료로 활용되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아빠이자 직업인인 남편의 삶 역시 자료로 활용되어 아빠에게도 온전한 육아를 허용하는 세상이 오기를. 오늘도 쌔근대는 아기의 숨소리에, 이유식을 오물거리는 그 작은 입에, 아장대는 오동통한 팔과 다리에 빈다.



이 글은 얼루어 9월호에 <모든 세대의 '김지영'>이라는 꼭지에 참여해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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