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력과 페미니즘의 이상한 상관관계
작년 2월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2주의 기간을 보낸 뒤 처음으로 집에 아기를 데려오던 날이 잊히지 않는다. 겉싸개에 둘둘 말려 겨우 얼굴만 빼꼼 나와 있었던 3kg의 생명체. 카시트에 앉아있다기보다는 올려져 있었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했던 모양새까지. 그 날의 온도도 기억이 난다. 햇살은 분명 노란 기운을 띠었고 봄내음은 확연했지만 아직 바람이 찼고, 나는 느슨해진 발목관절을 못생긴 수면양말로 보호하고 있었다.
나는 초산치고는 짧은 7시간의 진통을 거쳐 수중분만으로 순산을 했다. 오로는 거의 멈추었고 이제 도넛방석 없이도 회음부를 대고 앉을 수 있었지만, 꼭 오래달리기를 한 것 같은 개운한 피로가 하루종일 몸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내가 가장 원한 것은 바로 운동이었다. 산후조리에 대한 모든 안내서에는 출산 후 6주가 지나기 이전에 적극적인 운동을 금하라고 적혀 있었으나, 나는 4주가 지난 시점부터 참지 못하고 덤벨을 들었다.
임신은 운동을 시작하는 데 가장 좋은 동기가 될 수도 있다.
임신하기 전까지 내 인생에서 운동을 규칙적으로 실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임신과 출산을 계기로 나는 비로소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운동 방법을 찾았고 운동이 이렇게까지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언젠가는 이 경험을 글로 정리해두리라 생각해왔었고, 출산 후 1년이 훌쩍 넘은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좋은 동기가 될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임신기간의 예후가 개인에 따라 아주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정말 운이 좋아 임신기간을 건강하게 지났다. 체중조절을 악착같이 한 편이라 (임신 전체기간동안 12kg 증가) 약간의 부종 뿐 못 견딜 정도로 무거운 곳은 없었다. 그 흔한 변비도 없었고, 소양증이나 당뇨와 같은 합병증도 나타나지 않았다. 엄마에게 유전적으로 받은 체질도 어느 정도 있겠으나, 엄마가 임신중독증 때문에 나를 제왕절개로 낳은 것을 고려해보면 내가 새로이 들인 운동습관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임신 중 심한 입덧이나 두통, 심각한 부종, 허리나 고관절 통증, 우울증 등 내가 미처 알지도 못하는 수도 없는 증상들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경우가 아닌 이상, 아주 아주 가벼운 운동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정말 추천할 만하다. 아래 링크된 영상만 따라해봐도 바로 알 수 있다. 내가 장담컨대, 운동은 전혀 귀찮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다. 가벼운 운동은 조금 더 강도가 높은 운동으로 쉬이 연결되고, 어느샌가 하지 않으면 찌뿌둥해 견디지 못하는 지경이 될 것이다.
사실 임신중에도 나는 방송제작 업무를 계속했기 때문에 임신 6개월까지는 운동을 실천하지 못했다. 회사에서 최대한 편의를 봐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창 제작중인 프로그램에서 때때로 새벽 서너시까지 편집기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스케줄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다. 배뭉침과 다리 부종은 물론 자주 찾아왔으나 바쁘고 무심했던 나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러다가 프로그램이 종영하고 여유시간이 생기자 비로소 내가 만삭의 임산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때 찾아온 것이 출산의 공포, 순산에의 염원이었다. 남편과 함께 그 공포를 공유하고 자연주의 출산에 관해 공부하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등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았다. 그러는 와중에 남편이 유튜브에서 찾아 가져온 것이 임산부 운동 영상이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요가였고, 태아와 함께 호흡하는 명상 비디오였다. 그런데 유튜브의 연관 동영상 기능은 나를 빈야사로 데려다주었고, 조금 더 숨이 차고 땀이 나며 혈액순환을 활성화시키는, 그러나 결코 고통스럽지는 않은 유산소운동과 근력운동을 병행하게 되었다. 차분하고 단단한 동작들로 몸과 마음을 고르면서 순산을 도모할 때쯤, 검색어를 영어로 바꾸니 신세계가 펼쳐졌다. 'Prenatal Workout' 이 두 단어로 나의 홈트레이닝 역사가 시작되었다.
처음 만난 것이 Bodyfit by Amy 계정이었다. 요가나 한 1년 했었나, 가끔 하는 스트레칭과 윗몸 일으키기 외에는 운동을 '싫어한다'고 단언해왔던 나에게 에이미의 임산부운동은 심장이 빨리 뛰고 땀이 송글송글 맺히면서 피가 온몸 구석구석 퍼지는 쾌를 선사했다. 임산부의 몸에 무리가 안 가도록 전문가가 설계한 간단한 동작들을 따라하다 보면, 머리가 상쾌해지고 무거웠던 허리도 개운해졌다. 그렇게 이 가뿐함과 자신감에 중독된 나는 임신 8개월경이 되자 아침 요가 30분, 스레드밀에서 1시간 걷기, 14층까지 계단으로 올라오기, 홈트레이닝 20-40분을 매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의 시작을 함께 해 준 에이미는 아직까지도 내가 애용하는 트레이너다.
내가 임신이 운동을 시작하는 데 가장 좋은 동기일 수 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산전운동비디오는 강도가 아주 약하고 따라하기 쉬운 동작들로 구성되어 있어 진입장벽이 아주 낮다. 몇 가지 비디오를 골라 하나씩 따라해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트레이너를 골라서 그 계정의 여러 비디오를 섭렵하다보면, 왠지 오늘은 어제보다 약간 더 난이도가 있는 운동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붙는다. 그 자신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산후 1년이 된 지금의 시점에 나는 무릎을 대지 않고 푸쉬업을(평생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다), 스퀏 점프를 연달아 50회쯤, 케틀벨 스윙을 한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몸의 모양과 인바디 수치에서 변화가 나타난 것은 물론이지만,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상쾌한 기분이다. 걱정하지 않고 맛있게 먹고, 건강을 위해서 운동한다. 사회가 나에게 강요하는 여리여리하고 마른 몸은 운동이 아닌 유전자와 굶주림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란 걸, 대한민국 여자로 30년쯤 살아보고서야 알겠고 이젠 거뜬히 받아들였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운동하지 않고 아기를 번쩍 안아올릴 팔 근육과 오래 오래 이 가족과의 행복을 지탱해줄 허벅지 근육을 위해 운동하는 나 자신을 아주 자랑스러워 하는 그 기분이란, 몇 달 굶어 한 사이즈 작은 옷을 입는 위태로운 기분과 비교할 수가 없다.
2017년 2월 말, 욕조에 들어가서 힘을 주기 시작한지 40분만에 나의 딸 평화가 태어났다. 그리고 4월이 되자 나는 다시 아주 가벼운 운동부터 시작했다. 팔목과 발목 관절은 아주 약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몸에 충격을 주지 않는 유산소운동부터 시작했다. 그때 애용했던 것이 'Low impact cardio'라는 검색어다.
Fintess Blender는 홈트레이닝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접해봤을 계정이다. 어마어마한 수의 동영상을 보유하고 있고 종류도 엄청나게 다양하다. 덤벨이나 케틀벨, TRX 등 도구별 분류는 물론이고 '쉽게 질리는 사람을 위한 유산소' 식의 테마별 비디오도 있다. 나는 'Quiet Cardio'라는 비디오도 꽤 여러 번 따라했는데, 아기가 자고 있을 때 최대한 조용하게 운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주 유용했다.
출산 후 6개월경까지는 일주일에 5일, 그 이후부터는 일주일에 3일 이상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기가 자는 시간을 이용해서 15분에서 40분 가량 운동을 했다. 유튜브에 차고 넘치는 홈트레이닝 비디오들 중에서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소요시간과 강도와 운동기구를 바꿔 가면서 운동을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물론 이 역시 1년이라는 육아휴직기간을 넉넉하게 잡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는 상황이 뒷받침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오래도록 지치지도 않고 실천할 수 있었던 원동력들이 있다. 사실 이 글을 통해 그 원동력들을 공유하고 싶었다.
1. 정말 몸이 지치는 날에도 '10분만이라도 하자'고 생각하고 일단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일단 10분을 하면 몸이 풀려 10분 더 하게 되기도 했고, 정말로 지쳐서 10분만 하고 그만 둔 날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은 기운이 넘쳐서 45분 짜리 운동을 꽉 채워 하기도 했다.
2. 아기가 비교적 순한 편. 아기가 우리를 밤에 많이 괴롭히지는 않았다. 아주 신생아일 때는 2-3시간마다 깨곤 했지만, 밤샘 편집으로 단련이 된 몸이어서 그런 건지(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아니면 출산 후 엔돌핀이 샘 솟아서 그런지 일단 해가 뜨고 나면 활동력이 감돌았다. 아기가 신생아 시절을 지나 낮잠 자는 시간이 정착되고 나니 아예 운동 시간을 예측할 수 있었다.
3. 홈트레이닝은 나의 성격에 가장 맞는 운동 형태이다. 나는 운동하는 내 모습이 누군가의 시야에 노출되는 것이 싫다. 그리고 대부분의 GYM은 나에게 너무 춥거나 덥거나 냄새나고, 꼭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 - 그게 마초 트레이너든, 개저씨든 - 가 주위에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샤워를 하는 것도 싫고,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 것도 싫다. 운동은 역시 혼자, 맨발로, 조용하게, 집에서. 그리고 샤워도 집에서.
4. 내 남편은 칼퇴하는 페미니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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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항목을 보고 어리둥절하신 분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나의 홈트레이닝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많은 산모들이 산후 다이어트 고민을 나누면서 육아와 집안일로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이 말이 핑계가 아님을 알고 있다. 아직까지도 많은 가정에서 육아와 가사노동은 온전히 여성에게 일임되어 있고, 남편은 잘 '도와주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육아와 가사노동은 여성의 것도 아니고 남편은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다. 이 두 가지는 두 사람이 공동으로 맡아야 하는 일이다. 누군가 나에게 남편이 잘 '도와주냐'고 물으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남편이 나를 돕는 게 아니라 우리 둘이 같이 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같이 하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나와 남편이 둘 다 적절한 노동시간을 유지하는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남편은 매일 저녁 6시에 퇴근해 늦어도 7시면 집에 도착하며, 의미 없는 회식 자리가 필요하지 않은 직업을 갖고 있다. 나는 매일 남편의 아침 저녁밥을 챙기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저녁에 한하여 2인분의 식사를 서로 번갈아가면서 준비한다. 식사를 준비할 때 나머지 한 명이 아기를 보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남편은 본인의 아침 식사를 스스로 해결하며, 아기와 내가 자고 있으면 더 자게 놔두는 것이 우리 가족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디 표에 적어둔 것도 아니고 구두로 계약하지 않았지만 청소와 빨래, 이유식 만들기와 아기 돌보기는 시간과 체력이 남는 사람이 적정하다고 생각되는 타이밍에 번갈아 가면서 한다. 살펴보니 누가 해두었으면 고마운 거고, 안 해두었는데 할 때가 된 것 같으면 내가 하면 된다.
이것이 내가 아기가 잠든 모처럼만의 자유시간에 설거지나 청소나 빨래나 요리 등의 허드렛일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운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다. 내 이두박근과 삼두박근, 복근과 활배근, 허벅지와 종아리근육은 이다지도 사회적인 맥락에서 강화되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모든 개인의 건강상태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노동시간과 성역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물론 건강뿐은 아닐 것이다. 모든 개인의 행복을 구성하는 레시피에 아주 깊게 관여하는 것이 사회정치적 조건임을, 나는 이 임신과 출산을 통해 더욱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가 임신과 출산 기간에 홈트레이닝을 실천하면서 가장 깊게 깨달았고,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이것이다.
아직 강화할 근육과 흘릴 땀은 많이 남아 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나의 이 정기적인 스케줄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하면, 미룰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