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정읍에 스타벅스 있어요?
어릴 적 내 소원이 뭐였나 하면 '마리서사'레스토랑의 이탈리안 돈가스를 매일 먹는 것이었다. '마리서사'는 정읍에서 제일 유명한 레스토랑인데, 이곳 돈가스는 어릴 적 내 머릿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최고급 음식이었다. 치즈를 넣은 돈가스라는, 어린이가 좋아하는 최고의 메뉴에다 고급스런 분위기까지... 꼬맹이 시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힙한 음식과 공간이었다.
수많은 패밀리 레스토랑 브랜드가 뜨고졌지만 아직도 정읍 사람들은 이 레스토랑을 최고로 친다. 25년 넘게 없어지지 않고 정읍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데, 몇 년 전 방송에 나온 마리서사 셰프님 말이 "정읍에서 번 돈은 정읍에서만 쓴다"는 원칙으로 모든 식재료를 정읍에서 구매한다고 했다 ㅎ
어제 추억의 이탈리안 돈가스를 사먹으러 엄마호텔에서 50분을 걸어 정읍 신도심에 나가보았다. 마리서사 레스토랑이 10여년 전 정읍 구도심에서 신도심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집 앞에 시내 순환 버스가 한두 시간에 한 대 오는 터라 애초에 버스를 타고 갈 생각을 접고 걸어서 갔다. 정읍에 구도심과 신도심이 있는데, 수성택지지구 신도심은 확실이 새 건물이 많고 외식거리가 풍부했다. 정읍에 있는 동안 엄마 밥에만 의존하던 나는 오늘 드디어 어릴 적 너무나 좋아했던 돈가스를 사먹었다.
레스토랑 마리서사 대표 메뉴 '이채'(이탈리안 돈가스+생채볶음밥).
생채볶음밥도 이곳 대표 메뉴라고 해서 돈가스와 세트메뉴를 시켰다가 무척 후회했다;;;; 생채볶음밥은 너무 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맵기 난이도 최상급이었고 먹고 나서 속이 쓰릴 정도였다. 메뉴판에 고추 그림이라도 그려놓지, 오랜만에 먹은 어릴 적 선망의 음식은 그 환상이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래도 좋았던 건 어릴 적 추억의 레스토랑이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90년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정읍에 이탈리안 돈가스를 파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 서너곳 있었는데 나머지는 다 없어진 모양이었다. 이 레스토랑들은 주로 콘스프와 샐러드+돈가스+후식 음료를 한 코스로 해 팔았는데, 마리서사에 간다는 건 특별한 날에만 누리던 호사로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있다. 어릴 적 느꼈던 고급진 느낌은 이제 덜하지만. 90년대 풍요의 상징 '양식' 레스토랑이 여전히 건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푹신한 소파에 앉으면 웨이터가 각 잡고 주문을 받으며 테이블에 포크 나이프 수저를 놔주는 시스템, 소파 옆 분수대를 놓아 시냇물 졸졸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돈가스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인테리어였다.
여기도 정읍시장이 부여한 정읍맛집 상장이 걸려있다 ㅎ정읍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정읍맛집이 열 곳 정도 선정돼있는데 여기도 그 중 한 곳이다. 생각해보면 그 지역 주민들이 애정하는 외식 공간은 이렇게 따로 있는데 외부에서는 제대로 모른다는 걸 느낀다. 티비 맛집 탐방에 나오는 식당 중엔 정작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선택 받지 못한 곳들이 지역 맛집인양 나오기도 한다. 한번은 친구가 사는 여수에 방문했는데, 여수라고 하면 게장골목이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친구에게 방송에 나온 게장골목 00식당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친구는 정작 여수 사람들이 가는 게장백반 식당은 그곳이 아니다, 그곳은 음식이 안좋다는 소문이 있고 언제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걸렸다더라 하고 다른 식당으로 나를 이끌었다.
요즘엔 그 지역의 오래된 음식점보다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얼마나 있는가로 도시의 세련됨을 재단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5년 전 일하면서 만난 동료가 "정읍에도 스타벅스 있어요?"하고 물었다. 대화의 맥락상 정읍이 어느 정도 규모의 도시인지 모르겠는데 스벅이 있다면 인구 규모가 꽤 되고 도심도 상당히 발달한 곳 아니겠느냐는 의미였다. 정읍엔 스타벅스 대신 쌍화차거리가 있다고 했더니 껄껄껄 웃었다.
그 후로 1~2년 뒤 정읍에도 진짜 스타벅스가 생겨서 혼자 웃었다. 요즘 다른 카페들은 텅텅 비는데 스벅은 언제나 사람이 많다. 사실 정읍에 스타벅스가 들어오는 것보다 정읍의 오래된 커피숍이 백년가게가 되어 계속 남는 게 주민을 위해서나 관광객을 위해서나 더 좋을 것이다.
정읍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