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탈서울 Dec 12. 2020

진정 코로나 난민이 되었구나

일상 작은 것에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아침에 눈 떴을 때 이불이 뽀송뽀송한 것, 세수하고 나오면 식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고구마가 있는 것, 따뜻한 냉잇국에 갓 담근 김치로 아침밥을 먹는 것,  다시 침대에 누워 티브이를 보는 것, 나는 오늘 이 작은 일상 하나하나에 감탄했다. 모든 것이 엄마호텔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혼자 생활을 꾸려가는 서울의 일상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노동력이 드는 일들인지. 초가을 했던 이불빨래는 겨울이 오자 다시 눅눅해졌고, 사놓고 구석에 던져놓은 고구마 봉지는 부엌의 천덕꾸러기가 됐으며, 냉잇국은 재료 구비에서 설거지까지 휴일 한 나절은 시간을 바쳐야 해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다. 일년에 서너번 보는 티브이는 올초 아예 없애버렸다. 방구석 1열은 노트북으로만 가능하다.


서울에서 해먹은 자취요리 최대치. 바지락 메밀수제비+굴전+소시지 김치볶음+와인


일주일의 겨울 휴가를 준비하며 이번엔 엄마호텔 신세를 지지 말자 다짐을 안 한 건 아니다. 30대씩이나 되어서 엄마의 노동력에 기대어 행복을 느낀다는 게 양심에 찔렸다. 에어비앤비에서 일주일 머물 정읍의 숙소들을 알아봤다. 내장산 주변의 예쁜 펜션들,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호젓한 전원주택들, 시내의 한 가정집 아파트까지. 여행객처럼 숙소를 잡고 렌터카를 빌려 일주일 제대로 정읍 시내를 여행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엄마호텔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말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낯선 숙소에서 밥 해먹을 생각을 하니, 매번 가사노동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취 생활의 연속 같았다. 집밥에 대한 그리움과 휴식에 대한 간절함을 떨치기 어려웠다.  


오늘은 코로나 확진자가 950명이 나온 날이다. 따뜻한 냉잇국에 밥을 말아 먹고 침대에서 티브이를 보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실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외투를 챙겨입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막상 갈 데가 없었다. 정읍사 공원을 한 바퀴 돌며 신선한 겨울 공기를 마시고, 편백나무 숲 사이로 내려온 따스한 햇볕 한 줄기를 쬐었다. 고작 두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사람 많지 않은 예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하는 게 '정읍 스테이'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이젠 그 즐거움마저 누릴 수 없게 됐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로 앉아있을 카페가 없었다. 아예 이달 말까지 휴업이라는 카페도 있었다.   


정읍도서관 2층 열람실. 뒤편엔 <정읍의 작가들> 코너에 신경숙, 오은 등이 보인다.


참 오랜만에 도서관에 왔다. 다행히 도서관은 운영하고 있었다. 엄마호텔에서 10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다. 하지만, 좌석이 4분의 1로 줄어든 상태였다. 한 사람이 앉으면 앞, 옆, 대각선 총 세 자리는 착석금지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게다가 정읍 시민이 아니면 회원증을 발급 받을 수 없다고 했다. ㅜㅠ 역시 난 한낱 여행자의 신분일 뿐 정읍 시민의 지위에 낄 수 없었다. 회원증이 없으면 큰 열람실은 안 되고 자료실에만 앉을 수 있었다. 가까스로 한 자리가 있었다. 한 시간 앉아있었나. 고요한 곳에 있으려니 다시 '사무실 갑옷'을 입는 느낌이었다. 집도 카페도 도서관도 편하게 있을 곳이 없다니. 휴가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진정 코로나 난민이 되었구나. 


작가의 이전글 다시 온 엄마호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