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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한 단상

에필로그_이야기를 끝마치며

by 희야


· 사물 事物

1. 일과 물건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
3. 사건과 목적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


그들은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내게 필요한 것들을 고스란히 맡아주는 가방, 거칠고 딱딱한 바닥으로부터 여린 맨살을 지켜주는 신발, 아무에게나 턱 들이밀기엔 조금은 부끄러운, 엉덩이를 바짝 대고 앉는 의자. 그리고 하루를 마감한 뒤 모든 무게를 던져내듯 몸을 맡기면, 말없이 품어주는 침대까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것들. 그것들을 우리는 '사물'이라고 부른다.




· 단상 斷想

1. 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
2. 생각을 끊음.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다. 찰나의 순간, 무언가를 보고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어떤 대상의 이면을 바라보게 되었다거나, 평소엔 떠오르지 않던 낯선 관념이 불쑥 고개를 들거나, 오래전 잊혀진 줄 알았던, 기억 속 저편에 깊이 묻어뒀던 한 장면이라던가. 삶이라는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장면들.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단상의 조각들이 있다.




사물은 말을 하지 않는다. 고요한 침묵을 지킬 뿐이다. 하지만, 나는 사물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누군가와 함께 지내며 묻 손때, 많은 경험을 겪으며 생긴 표면의 긁힌 자국, 오랜 시간을 보내오며 바래버린 색감, 그리고 어떤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짙은 향기. 그것들은 결국 누군가의 시간을 품은 흔적이다. 어쩌면, 사물은 그것을 '사람의 기억'보다 더 정확하게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기억은 왜곡되고 지워지지만, 사물은 무심한 듯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기억을 더듬기 위해 사물의 곁을 서성이기도 한다. 일생을 살아가며 수많은 사물을 사용하고, 버리고, 떠나보낸다. 그 과정은 물리적인 소비활동 같지만, 사실은 감정의 교환이기도 하다.


물건 하나를 떠올릴 때, 그 안에서 누군가의 얼굴, 어떤 계절, 어느 한 장면이 함께 따라오는 건, 그 사물이 단지 물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확장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물 중 많은 것들이 내 곁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이 닿지만,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 책상 위의 머그잔, 현관 앞의 신발, 밤마다 스르르- 몸을 눕히는 침대. 평범한 일상에 파묻혀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던 것들. 어쩌면 그 안에, 잊고 있던 내 삶의 온기가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지 떠오르지도 않는 누군가의 까마득한 웃음소리, 누군가의 따스했던 손길, 아주 사소하고 평범하지만, 자연스레 숨을 쉬듯 없어선 안 될 기억들이 묻어있는 순간들. 기억은 자주 사라지지만, 사물은 그것을 품고 조용히, 나의 곁에 남는다. 그런 것들은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다. 사물을 단순히 물건으로만 여긴다면, 삶에서 지나쳐가는 그저 그런 것 중 하나로만 머물 것이다. 금방 휘발되고 마는 수많은 기억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안의 시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익숙함 속에 파묻혔던 소중한 것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사실, 사물은 말 그대로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는 물건일 뿐이다. 기능을 수행하고 쓰여지다가, 때가 되면 사라져 버리는 것. 아무런 감정도 없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도 차갑지 않은가.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 보이지 않는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마음이 존재할 때, 이 세상이 조금은 더 따뜻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런 감각을 지닌 이들의 하루는, 모든 걸 무심코 지나치는 이들의 하루보다는 어쩌면, 조금 더 특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질지도.




나의 평범한 일상 속, 늘 함께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매일 내 곁에 있기에 그다지 색다를 일도 없는 것들. 늘 각자의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들. 언젠가부터, 그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을 여러 번 지나고 나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한층 깊어진 감정이 어느덧 심연의 경계까지 넘나들게 되었다.

그렇게, 그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익숙해서 당연스레 스쳐 지나갔던 것들에게, 내가 살아온 시간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부터 말이다.

사람도 그렇다. 내 곁에 당연하듯 존재하던 이를 잃고 나서야, 그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곤 한다. 그렇게 잊고 있던 것들이, 지금도 여전히 내 옆에 함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일 것이다. 사물에 깃든 흔적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무형의 것들이.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나의 사물을 바라본다.

말 없는 존재가 전해주는, 조용한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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