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달콤한 향, 그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존재
4년 전, 제가 종종 즐겨 먹던 도넛이 있는데요. 둥근 형태에 가운데 구멍이 뽕 뚫린, 겉면에는 형형색색의 팝핑캔디와 스프링클이 고루 뿌려져 있는 그런 곱디고운 분홍색 도넛. 아- 저 자태를 보세요,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색은 또 얼마나 예쁜지! 한때 저는 이 친구를 '분홍이'라고 불렀답니다.
누구에게나 취향은 있는 거잖아.
내 취향은 이래, 넌 어때?
분홍이와 나의 인연은 약 3년 동안 이어져 왔다. 워낙에 빵을 좋아하는 나에게 던킨은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길거리를 지나다가도 분홍빛과 주황빛이 어우러진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오면 발걸음이 멈추기 일쑤였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보면, 'DUNKIN’ DONUTS'이라는 간판이 날 사춘기 소녀처럼 설레게 했다.
도넛 계에 존재하는 양대 산맥이 있는데,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거다. 바로 던킨 vs 크리스피. 여러분께만 은밀히 고백하자면, 나는 던킨 파이다.
던킨과 크리스피는 각기 다른 개성을 지지고 있다. 매장의 느낌부터 다르다. 어두운 녹색 컬러에 차분한 느낌이 드는 크리스피. 내부 역시 깔끔한 분위기에 직장인이 커피와 도넛을 함께하며 잠시 업무를 보고 가기에도 나쁘지 않은 곳으로 느껴진다.
반면 동화 속 어느 쿠키 가게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듯, 밝고 화려한 색상으로 또렷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던킨. 업무를 보기에는 다소 휘황찬란한 매장 분위기인지라 누군가와 도넛을 맛보며 수다를 떨기에 더 좋은 곳이라고나 할까.
도넛의 맛 또한 확연한 차이가 있다. 크리스피의 도넛은 부드럽고 말랑거리면서도 쫄깃한 식감을 자랑한다. 겉에는 설탕 시럽이 코팅되어 촉촉하기까지 하다. 한두 번 씹으면 사르르 녹아버리는 식감. 반죽이 비교적 가벼운 느낌이다. 크리스피는 속에 뭔가 들어있는 종류가 많다. 크림 같은 것들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크림이 가득 든 게 맛있다고 하더라. 근데 나는 그런 내용물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던킨은 밀도가 꽉 찬 반죽이 특징이다. 던킨의 도넛을 한 입 베어 물면, 묵직한 듯 말랑말랑한 빵 피가 나의 딱딱한 이빨에 푹 찌부된다. 그때의 그 빵이 씹히는 폭신한 식감! 나는 그 식감을 좋아한다.
분홍이와의 첫 만남, 달콤한 역할,
그래 딱 거기까지만 하자.
겨울로 넘어가기 직전, 공기가 제법 차가워진 마지막 가을날이었을 거다. 그날도 과중한 업무에 축 처진 몸을 에스컬레이터에 싣고 영혼 없는 인형처럼 지하철역 안으로 운송되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반 정도 내려갔을 때쯤, 어디선가 은은하게 퍼지는 달큰한 향이 콧속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오는 게 아닌가. 어라? 이게 뭔데 자꾸 허락도 없이 새어 들어오는 건가 싶어서 남은 계단을 찬찬히 걸어 내려갔다. 지금은 터지기 직전 상태인 뇌의 전원을 잠시 꺼두는 시간인데, 허락도 없이 나의 행동 제어 시스템을 수동에서 능동으로 바꾼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경계심에 속도를 내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수록 더욱 진해지는 향에 무슨 약을 타기라도 한 건지, 그 향이 내 뇌에 침투하여 발걸음을 마구 재촉하고 있었다. 그렇게 뭐에 홀린 듯이 종종걸음으로 도착한 곳. 온통 무채색 배경 그 사이에서 혼자 형형색색의 밝은 빛을 뿜어내는 곳. 왠지 화려한 색채를 뽐내면 안 될 듯한 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게 난데? 뭐 어쩔 거야!' 하며 막무가내로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런 생각도 잠시뿐이다. 내 뇌는 이제 이 달콤한 향에 완전히 취해버렸기 때문이다.
눈앞에 알록달록한 마법의 도넛이 가득한 세계가 펼쳐졌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쿠키 집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역사 안에 자리한 곳이라 그런지, 따로 문이 없었다. 그래서 향이 가둬지지 않고 사방으로 퍼져 나왔나 보다. 덕분에 가지런히 진열된 도넛들의 아름다운 자태 역시 한눈에 들어왔다. 누가 이렇게들 어여쁜 색동저고리를 입혀놓은 거야. 게다가 너무 선명해서 쨍한 색감이 아닌 약간의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색감인 것까지 마음에 드는구나. 동글동글한 모양은 또 어떻고, 너무 귀엽잖아!
이들에게 혼이 뺏겨 연신 감탄을 남발하며 시선을 옆으로 옮겨가던 중, 한 도넛이 눈에 들어왔다.
진한 딸기우유의 색감을 가진, 다른 도넛에 비해 크기가 크고 몸뚱이가 두툼한, 가운데 구멍이 뽕 뚫린 둥그런 도넛. 그 위를 화려한 스프링클로 뒤덮었는데, 이름하여 'HAPPY BIRTHDAY'라는 도넛이다. 어쩜 이리 부드러운 분홍색 피부를 가지게 되었니. 이 중 네가 제일 예쁘다. 도넛이 내게 말하는 듯했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날 만나는 날이 늘 네 생일일 거야. 생일 축하해."
별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오늘은 너다!
집에 돌아와 몸을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먹을 준비를 했다. 원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커피를 마시지는 않지만, 도넛에는 커피인걸. 거기에 왠지 우유도 잘 어울리는 맛일 것 같아 흰 우유도 함께 준비했다.
맛보기 전에 먼저 냄새를 한번 맡아본다. 부드러운 딸기우유와 달콤한 딸기 초콜릿 그 중간의 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 냄새를 맡았으니 참을 수 없다. 양손으로 도넛을 들고, 입을 크게 벌린다. 그리고 한입 베어 문다. 폭신-폭신-거리는 식감에 혀를 부드럽게 감싸는 우유의 맛을 뚫고 올라오는 달콤한 맛, 그 위를 사르르 뒤덮은 딸기의 향..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구나. 아, 맛있다. 도넛을 한 입씩 베어 물 때마다 몽글몽글한 구름 위를 살포시 밟는 느낌에, 술을 마시지 않고도 흠뻑 취할 수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참, 이 도넛 안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나는 크림이나 잼이 가득 든 빵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도 내 입맛에 딱 맞는 도넛이다.
이 도넛은 마치 자신이 가진 모든 장기를 다 살려 나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음식 같았다. 네가 나에게 이런 행복을 선사했으니, 나도 너에게 이름을 지어줄게. 네 이름은 이제부터 '분홍이'야!
그렇게 하나를 다 먹고 나니, 오묘한 향이 코에 맴돈다. 괜스레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뭔가 익숙하고 푸근한 냄새, 어딘가 뭉클해지는 그런 이상한 기분. 어릴 적에 누군가와 함께 이런 도넛을 먹었던 거 같은데, 아직은 꺼내고 싶지 않은 거 같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걸 보면. 굳이 그런 옛 기억까지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존재는 소멸한 거라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이별한 거라 표현하면 되는 걸까.
나는 종종 분홍이를 찾았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친 날은 여러 개를 먹기도 하고 정신이 맑은 날은 절제력을 발휘해 딱 하나를 온전히 맛봤다. 가장 열심히, 또 힘들게 일하던 그 시기를 나는 분홍이와 함께 버텼다. 그리고 어느덧, 내가 3년가량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는 날이 오게 되었다. 별일이 다 있었고, 온 마음을 다해 일했던 곳. 그곳을 떠남과 동시에, 나는 더 이상 분홍이를 찾지 않게 되었다.
여행을 자주 떠났다.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또 새로운 음식을 먹고. 그렇게 새로운 것들로 나를 채워갔다.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그랬던 걸까. 유독 단 음식이 당겨서 더 분홍이를 찾게 되었던 거 같다. 이제는 딱히 분홍이 생각이 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때의 기억들은 모두 희미해지고, 내 몸과 마음도 한결 평온해졌다.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고 나니 나도 여유가 생긴 것일까. 오랫동안 외면하고 쌓아뒀던 사진첩 정리를 해볼 심산으로 오만 오천 개의 사진이 쌓여있는 낡은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 것이다. 분홍이와의 추억을. 다시 새록새록 떠오르는 그때의 향과 맛, 오랜만에 분홍이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래, 새해를 맞아 도넛이나 왕창 먹자,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집 근처의 던킨 매장을 들렀다. 아니 사실 근처라고 하기엔 꽤 먼데, 굳이 버스를 타고 찾아가야 하는 장소였으니 말이다. 왠지 살짝 설레는 마음을 누르고 투명한 유리문을 열었다. 역시나 아직까지 알록달록한 빛깔을 자랑하는 던킨. 분홍이와 다시 조우할 생각에 이내 들뜬 마음으로 진열대를 훑어봤다. 이상하다. 아무리 찾아도 분홍이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작은 매장이라 그런가 싶어서 직원에게 물었다.
"어, 그 도넛은 작년에 단종되었는데요?"
맙소사,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혈 검색 모드로 들어가 모든 정보를 다 뒤졌다. 중간중간 같은 이름으로 비슷한 모양새를 한 도넛이 몇 번 나왔지만, 이건 분홍이가 아닌걸. 크기도 다르고 빵도 다르고, 겉에 입힌 딸기 초콜릿 코팅만 똑같잖아. 일단은 아쉬운 대로 분홍이와 가장 비슷하게 생긴 도넛을 골라 집으로 데려왔다. 맛은 역시나 분홍이와 달랐다. 빵도 다를뿐더러 안에 크림까지 들어있다. 그래도 딸기 초콜릿 코팅 맛은 분홍이랑 비슷해서 그걸로 위안을 삼았다. 그깟 도넛 하나 단종된 게 얼마나 큰 일이라고, 그런 생각과 달리 나는 자꾸 분홍이를 찾았다. 근데 별 수 있나. 이미 단종된 도넛을 무슨 수로 맛볼 수 있겠나.
한동안은 생각도 나지 않더니, 없어졌다니까 찾는 건 무슨 심보인지. 사실 딱히 원하지도 않는데 만날 수 없다니까 괜히 간절해지는 거 아닌가? 아니면 내가 이토록 소중히 여겼다는걸, 만날 수 없게 되니 깨닫게 되는 걸까. 뭐가 됐든 간에 하나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분홍이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결론을 내림과 동시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느꼈다.
아, 기억났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어떤 이와 함께 종종 던킨 도넛을 먹곤 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머리가 찡한 술 냄새는 싫었지만, 달콤한 향을 가득 풍기는 도넛은 좋아했다. 박스를 열어 작고 동그란 도넛 하나를 입에 베어 물면, 몸 안에 싹 퍼지는 달달한 기운이 좋았다. 그도 그걸 좋아했는지 슈가파우더가 잔뜩 덮인 도넛 하나를 입에 물었는데, 다 큰 성인이 입가에 하얀 가루를 잔뜩 묻히고 먹는 그 모습이 꽤나 별로였다. 나는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존재. 그들을 세상에서 소멸된 거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이별한 거라 표현하면 되는 걸까. 좋게 포장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어차피 영영 만날 수 없는 건 같은데 말이다.
나는 이제 분홍이도, 그 어떤 이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 그들이 영원히 소멸한 것인지, 아니면 나와 이별하고 어딘가에서 또 다른 생을 살고 있는 건지 알 길은 없다. 그냥 그들이 언젠가 나와 함께 했었다는 것을, 그 순간이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시인하며. 그렇게 그들을 보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