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지새우며 창밖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빛으로 내 안에 있는 감각이 하나씩 깨어갈 때, 이 서서히 더워지는 늦봄에 겨울같이 새하얗게 되는 설국을 그린다.
새벽빛은 늘 하얗게 들어온다. 실존이 투명이라면 투명에 가장 가까운 흰색이 가장 의식을 환하게 하는 색일까... 하얀 창밖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채색의 생활이 펼쳐지고 있었다. 도시와 시골, 현재와 과거가 오히려 무채색과 유채색으로 대비된다. 반대이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과거는 잊혀서 희미하고 현재는 생동감으로 밝아야 할 것인데 나는 어디를 살고 있는 것일까. 창밖 너머로 운동장에서 유채색을 가지고 열심히 운동하며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보인다.
어느 한겨울 날 홀로 떠난 기차여행에서 만난 설국의 세계.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기차가 함박눈으로 쌓인 세계를 지나갈 때 내 전체가 눈처럼 그 순간에 녹아들었다. 이럴 때 그런 말을 쓰나 보다. 순간이 영원이고 영원이 순간이구나. 미지의 세계는 늘 새신부 마냥 날 설레게 했다. 어릴 적 나는 그림처럼 익숙한 세계가 지겨워질 때 호기 있게 작은 여행을 떠나곤 했다. 혼자서 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한 이 마을의 끝 편에서 새로운 마을에 발을 디디고, 자전거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새로운 동네로 선을 넘기도 하고, 아예 마을이라는 감각을 잃어버린 채 버스를 타고 순간 이동하듯 이 정류장에서 저 정류장까지 창문 밖의 세계에 넋을 잃고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용기 있어봤자 그건 우리 집의 누군가가 나를 찾아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떠난 이탈리아 베니스 여행은 이건 아예 정신의 개벽을 트는 대륙간의 모험이었다.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 뜬 '1파운드 왕복 여행'배너에 귀신에게 홀리듯이 그냥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새도운 대륙에의 도전에는 면밀한 사전 계획도 치밀한 여행 목적도 없는 그냥 아주 합리적인 이유, 싸다는 것이었다. 부푼 꿈이 한참이나 쪼그라든 뒤에서야 허겁지겁 여행책을 사서 호텔을 물색하고 인천공항에 어떻게 갈 것인가 리무진 버스를 예약했다. 문제는 버스에서 만난 키 작고 야리야리한 친구의 짐을 목적지까지 들어주느라 비행기 시간을 아주 조금 놓쳤는데 결국 비행기표는 그냥 밋밋한 가치 없는 종이가 되어버렸다. 비듬 섞긴 긴 머리를 한참이나 긁고 나서야 결국 새로운 비행기표를 사서 자리에 앉았다.
경계와 경계에서 두려움과 설렘이 계속 나를 때렸고 마침내 베니스로 가는 저가 항공기는 이륙하기 무섭게 비행기 양쪽 날개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베니스에 새벽 도착이라 버스가 있을 리 없고 호텔 체크인 시간도 맞추기 어려워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있는 외국인이 말을 걸어왔다. 영어로 한 대화라 거짓말이 잘 안 나와서 있는 사실대로 말해버렸는데 하늘이 멍청한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는지 그 친구가 숙박장소로 자기 집을 공짜로 묵게 해 주었고 돈이 없는 내게 3일 내내 밥도 공짜로 주고 여행 가이드도 해주었다. 그분의 가족과 함께 베니스를 돌며 미술 작품을 보았는데 그 작품은 그분들의 인심만큼이나 값져 보이고 막 나온 칼라 티브이처럼 입체적이었다.
나의 새로운 대륙에서의 첫 어리둥절한 여행은 그렇게 아슬아슬하면서도 절묘한 우연의 일치를 그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의 도전은 늘 무모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새로운 세계로 가고 있었다. 대부분은 우연과 행운으로 나를 맞았고 그 달콤한 불안감과 설렘은 두 번째 세 번째 여행을 계획하게 만들었다. 어릴 때 그렇게 여러 번 미지의 세계의 고비를 넘고 넘었는데 늙은 지금의 나는 가장 오래된 흑백의 세계를 살아오는 것 같다. 아마 이건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우연의 실패에 쓴 맛을 많이 보아서 더 이상의 이륙을 피하려는 심리일 것이다. 도전과 모험이 없는 세계는 무채색의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숫자와 같다. 우연이라는 행운이 더 이상 오지 않을지라도 과거의 행운은 과거의 불운과 수지를 맞추고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은 떠나야 할 것이다.
눈부신 새벽빛에 발맞추어 우연히 혼자 떠나는 여행을 상상으로라도 가보아야겠다. 예전처럼 아날로그 하게 다이어리에 연필로 준비물을 적고 행선지를 스케치하고 미리 전화도 넣어보고, 언제 가려고 하는데 방은 있는지 괜히 메일도 써보고 말이다. 나이 들어 홀로 떠난 여행에서 우연히 과거의 나를 만나게 되면 꼭 안아주어야겠다. 다시 용기 내서 기쁘노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