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설 <브로크백 마운틴>
이안 감독, 애니 프루의 소설
청춘 남녀의 사랑이 뭐였던가... 아련히 생각 날듯 말 듯할 무렵 이 영화가 떠올랐다. 원서를 기다리는 내내 가슴이 설레었다. 영화로 본 것이 언제 적인데 그 감정이 아직도 기억나는 것일까... 어린 시절의 한 기억이 영상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닌 한 컷의 사진으로 기억하는 그것. 이것이 영화의 힘이다. 글과 이미지, 음악, 역사 모든 것을 버물려 놓은 종합 예술- 영화.
게이의 사랑? 양성애? 불쾌한가? 그러면 동성의 사랑이라면 덜 불편할까?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모르겠다. 내가 한순간 사랑했다고 하는 사랑이 지나고 보면 다 사랑이 아니더라. 지금 하는 것도 사랑인 지 지나고 보면 알겠지...
Jack Twist와 Innis Del Mar. 1963년 그들은 브로크백이라는 산에서 양치기로 만난다. 그저 그런 특별할 것 없는 시골 동네서 일거리를 찾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는 그들은 목장 주인에게 산에서 숙식하며 양을 돌보라는 지령을 받고 산으로 오른다. 사랑 많고 쾌활한 성격의 카우보이 사나이 잭과 좀체 입을 열지 않고 불평 없이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이니스. 몇 날 며칠 밤이 지나고 그렇게 어색함을 깨고 서로를 알아간다.
단편인지라 스토리 전개 속도가 아주 빠르다. 이안 감독이 빠른 스토리라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원서 자체가 그런 것임을 알게 된다. 둘은 어느 날 밤 사고를 친다. 그래, 사고다. 둘 다 인정한다. 서로 게이가 아니라고. 그리고 한 번, 두 번... 괜찮다고 말하는 잭. 서로를 쓰다듬으며 평생 잊지 못할지도 모르는 시간을 보내지만 폭풍 때문에 산에서 내려오게 되고 어색한 마지막 인사를 뒤로 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담담한 일상이 이어진다. 이니스는 약혼녀 Alma와 결혼을 하고 두 명의 딸아이를 낳아 부양하기 바쁘다. 잭도 마찬가지. 열정적인 부잣집 아가씨 Lureen을 만나 아들을 낳고 중장비 영업을 한다.
그렇게 4번의 여름이 가고, 잭은 이니스에게 엽서를 보내고 둘은 재회한다. 만나자마자 그 세월 동안 어디서 감춰놓은 지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사랑이 요동치고 부둥켜안고 키스를 한다. 그것을 우연히 보게 된 앨마. 이니스와 잭. 둘은 그렇게 20여 년을 한 해, 두세 번의 낚시 친구로 위장해 사람들이 눈이 없는 곳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그 사이 이니스와 앨마는 말 못 할 배신과 외로움으로 이혼을 하고 이혼 소식을 듣자마자 잭은 차를 몰고 달려오지만 변한 건 없다, 우린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이니스의 대답에 잭은 상처 받는다.
여기서 잠깐, 이니스와 잭의 사랑을 수십 년 지켜본 앨마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자기 남편이 사랑하는 남자와 매년 여행하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는 한 여자.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앨마는 이니스에게 말한다.
당신은 그 친구와 낚시를 하러 떠나지만 왜 송어 한 마리 잡아온 적이 없느냐고... 당신이 여행 가기 전날 밤에 낚시 바구니를 봤는데 5년 전 살 때 걸려있던 가격표가 그대로 걸려 있는 걸 봤다고. 그리고 메모를 써서 붙였죠. '사랑하는 이니스, 제발 고기 좀 잡아와요.' 하지만 여행 후에도 낚시 바구니에는 여전히 물에도 젖지 않은 내 메모가 달려있었죠...
그 오랜 세월 동안 앨마는 가슴 찢어질 듯한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냈을까... 앨마는 이니스를 정말 사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그를 놔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상처 받지 않는 삶은 없다. 이니스도, 앨마도, 잭도... 이니스와 잭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이니스는 딸아이들 양육비를 대느라 쉴 새도 없이 목장 일을 해야 하고, 잭은 풍요롭지만 처가살이에 눌려 정신이 외로운 가엾은 영혼이다. 사랑하지만 그 당시 사회 분위기는, 지금도 그렇지만, 공식적인 게이의 만남이란 있을 수 없고 들킬 시에 잔인하게 폭행당해 죽는다. 더 사랑하는 자가 더 아픈 법일까... 잭은 자기 부모님이 있는 목장으로 가서 같이 삶을 꾸리자고 조르지만, 이니스는 어릴 적 동네 게이 할아버지의 잔혹한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에 그런 일은 엄두도 못 낸다. 그리고 사회적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인 마인드와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이 있다.
일 년에 한, 두 번 밖에 시간을 안 내주는 이니스에게 잭은 '어떻게 하면 너와 끝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폭발하고 우리에게 남겨진 건 브로크백 산의 추억밖에 없다며 운다. 이니스는 늘 돈이 없어 파산하는 신세가 어떤 건지 양육비라는 말은 아느냐고 화를 내고 한 번만 더 멕시코에 가서 그 짓을 하면 죽을 거라고 화를 낸다.
어느 날, 이니스가 잭에게 보낸 엽서가 되돌아오고 거기엔 '사망'이라는 선명한 잉크 자국이 찍혀 있다. 게이로 들켜서 처절하게 폭행당해 죽은 잭.
잭 부모님의 집에 방문한 이니스. 그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이니스가 원망스럽다. 이제 왔느냐고 이니스를 노려보는 잭의 아버지의 눈이 날카롭기 그지없이 섬광이 번뜩인다. 유년 시절 잭의 방을 그대로 뒀다는 잭 어머니의 말에 잭은 위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옷장 구석에서 그 옛날 브로크백 산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이니스의 낡은 체크 남방이 잭의 남방 안에 곱게 포개어져 옷걸이에 걸려있다.
잭의 사망 직후 이니스는 무채색, 무음인 마냥 덤덤하게 감정을 표현하지만 이니스가 잭의 티셔츠에 얼굴에 갖다 대며 다시는 맡을 수 없는 그의 채취를 맡으며 아파할 때 슬픔은 독자에게 더 크게 울린다. 이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시 영화를 봐도 가슴 안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의 주체가 무슨 성인지, 사랑의 기준과 규격 안에서만 사랑이 성립되는가? 사랑의 길이로 사랑의 깊이를 잴 수 없는 것처럼 동성의 사랑이라 하여 우리들이 하는 사랑보다 얕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랑의 종류는 많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기애... 누구와의 사랑이든 사랑을 받는 객체가 최소한 아파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 할 지라도 어려운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소설 마지막 부분이다. 이니스는 브로크백 마운틴 사진이 있는 엽서를 주문해 트레일러 옷장문에 꽂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이 합치한 셔츠가 그 밑에 걸려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Jack, I swear..."
소설가인 애니 프루에 대한 경애심을 금치 못한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돌 맞을 감성적인 사랑의 서사시를 이렇게 짧고 굵게 그려낼 수 있는 건지...
그리고 이안 감독의 연출에 극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영화답게 매 장면 하나하나가 다 예술이고, 소설 원작을 이렇게 충실히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싶다. 소설을 보고 영화를 보면 늘 실망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사진 작품 같이 찍어낸 너무나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씬 하나하나가 감상하기도 전에 흘러가버리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브로큰백 마운틴. 묵직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