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이때껏 보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소재를 다룬 흡입력 있는 스토리.
단숨에 건너갈 수 있는 간결한 문장.
문장 한 줄 한 줄마다 간결하고 아름다워서 어느 하나라도 떼서 간직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안타깝다...
읽고 난 뒤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신비로움.
무엇을 읽었는지 알 수 없는 몽상적인 느낌.
판타지 소설인지, 스릴러인지 영역의 모호함.
모호함. 그것이었다. 모호함을 명확성으로 해석하고야 말겠다는 내 의지.
프랑스 파리. 지독한 냄새가 나는 시궁창에서 생선을 파는 영아 살인자의 아들로 겨우 살아남은 쟝 바티스트 그르누이. 엄마는 갓난아이인 그를 생선 내장과 같이 쓰레기로 버려졌다.
1738년의 프랑스. 인권이란 어디 있었겠는가. 아이는 고아 수용소로 보내지고 여러 사람을 거쳐 온갖 역경에도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아기인데도 아기의 냄새가 나지 않는 무취인 존재. 그러나 정작 본인은 시각보다 냄새로 모든 사물을 더 빨리 인식하는 존재였다. 냄새로 맡을 수 없는 추상적인 단어- 사랑, 희망, 정의-는 그에게는 익힐 수 없는 죽은 언어와 같았다.
냄새로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풍부함과 언어의 빈곤함으로 인한 그 모든 이상한 불균형들로 인해서 그르누이 소년은 말의 의미를 포기하게 되었다. page 43
그의 뛰어난 후각은 그의 존재의 이유였다. 스스로에게서 맡을 수 없는 사람의 냄새를 그는 향수로 만들고자 했다. 어쩌면 그가 원한 건 향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맡을 수 있는 그런 아늑한 태고적의 젖 냄새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 모든 것의 냄새를 구분하는 그가 그 자신의 냄새를 맡을 수 없을 때 느낀 그 공포는 아주 근원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냄새에 대한 그의 집착. 향기를 통해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그의 억눌린 욕망. 태어난 순간부터 축복을 받지 못한 이 다리 저는 흉측한 생김새의 그르누이에게 작가만은 그의 편이 되어준다. 어린 소녀의 향에 취해 처음 그녀를 죽이고 그 뒤로 24명의 소녀를 살인하여 그들의 향기를 수집한다.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향기의 소실에 상실감도 느끼지만 그에게 향기는 삶의 이유였다.
25번째 소녀에게서 가장 귀한 에센스를 채취하다 결국 희대의 소녀 살인마로 체포된 그르누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사형뿐이었다. 십자가에 매달고 사지가 찢길 때까지 쇠몽둥이로 내리치라는 판결을 받은 구르누이. 사형 집행일에 만 명의 사람들이 모이고 그가 처형대에 오르자 기적이 일어난다. 그가 완성한 향수를 그에게 뿌리자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살인마가 아니라고 여기고 무아지경에 빠져 온갖 본능적인 행위를 하기 시작하고 마지막 희생된 소녀의 아버지마저 눈물을 머금으며 그를 꼭 안아준다. 자신의 승리를 거머쥔 그르누이. 그러나 정작 그는 희열 하지 않았다. 행복하지도 않았다. 평생 경멸받으며 살아온 그는 사람들의 행복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없었다. 증오 속에서만 그가 살아있음을 안 것이다. 그가 뿌린 향수라는 가면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혐오하거나 증오할 수 없었다.
어디에서도 구원받을 수 없는 그의 영혼. 향내든 악취든 그만이 가진 고유의 사람 냄새가 나는 그를 사랑해주기를 바랐을까... 그는 무죄로 풀려나고 허무하게 자신이 태어났던 악취가 풍기는 파리로 돌아간다. 밤이 되자 부랑자 등 온갖 천민들이 모여있는 납골당에서 구르누이는 마지막 남은 향수를 자신에게 뿌리자 그들은 신비로운 향기에 매료되어 그를 덮치고 그리고 그를 물어뜯고 살점 하나 남김없이 먹어치워 버린다. 그러나 순식간에 식인종이 된 그들은 죄책감 하나 없이, 오히려 마음에 알 수 없는 평화가, 행복이 깃든다.
엔딩은 무엇일까? 악을 소멸시킨 그들이라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걸까... 작가가 그르누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연민을 생각하면 어쩌면 그르누이를 이런 엔딩으로 구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판타지 같은 동화에 내가 또 어떤 심오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걸까?
저자인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독일인인데 소설의 배경은 프랑스로 읽다 보면 프랑스 곳곳을 여행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프랑스 격변기 역사를 엿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신을 경시하고 과학 문명과 인간의 이성을 숭배하기 시작하는 철학관의 변화를 소설에 잘 담고 있다.
실제 구르누이는 저자인 파트리크 쥐스킨트 본인을 그린 것 같다. 실제로도 그는 모든 상을 거부하고 어떤 공식 석상에 나서지 않고 은둔자의 삶을 살고 있다.
오래전에 그가 쓴 <짐머 씨 이야기>를 읽었는데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다시 읽어보고 싶다. 이렇게 글로 안 남기면 기억 뒤로 사라져 책을 읽어가는 그 순간 내가 느꼈던 소중한 감정을 잃어버리기에 최근에는 나를 위해 이렇게 긁적이고 있다.
오늘 하루도 소설을 입구 삼아 현실 도피와 망각으로의 출구로 나와본다... 그러나 실존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프루스트가 한 말이 자꾸 나를 찌른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생활에 소개해준다. 그러나 독서 자체가 정신생활을 구성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