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리코르디아(2024)
'자비'라는 제목의 영화가 웃길 수 있다?
그 웃긴 영화는 바로 <미세리코르디아(Miséricorde)>다. <미세리코르디아>는 분류하자면 범죄 스릴러 장르로 포스터도 제목도 우스운 점이 없다. 근데 분명히 웃기다. 게다가 자비와 연민이란 뜻의 영화의 제목과 달리 정작 영화에서 그런 고귀한 감정들은 한 프레임도 담아주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의 심리는 안개 낀 숲속 같고, 주변인들이 주인공에게 보여주는 감정은 안개 속에서 만난 장애물처럼 당혹스럽다. 도대체 여기서 무엇이 '자비'란 말인가?
영화의 인물들은 자비롭게 포용하는 척, 서로를 소비하고 이용한다. 여기서 자아내는 웃음은 냉소가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자체의 슬픈 농담 같다. 아무도 진정으로 자비롭지 않은 영화 속 '자비'의 반복은 허위성과 허망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승의 장례식을 위해 10년 만에 고향 마을, 생-마르시알로 돌아온 '제레미'. 그는 미망인 '마르틴'의 따뜻한 환대를 받지만, 친구였던 아들 '뱅상'의 노골적인 경계심에 부딪힌다. 옛 친구 '왈테르'도 반기지 않고, 노신부 '필리프'의 기묘한 관심까지. 조용한 이 마을에 갑자기 등장한 제레미는 걸어 다니는 사건 그 자체다.
마을을 떠나라 종용하는 뱅상과 마을에 머물고자 하는 마르틴. 둘은 숲속에서 싸우다가 마르틴은 우발적으로 뱅상을 살해하고, 시체를 숲에 묻어 유기해 버린다.
하지만 뱅상의 수색대가 꾸려지고, 제레미는 초조해진다. 이 와중에 숲으로 버섯을 따러다니는 마을 교구의 노신부는 제레미가 뱅상을 살해한 범인임을 알고 있었다. 신부는 제레미에게 고해성사를 하겠다고 청하고, 범인이 제레미임을 알며 자신은 자비를 베풀고 싶다고 한다. (고해는 신부가 제레미에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자비의 웃기는 역설이 시작된다. 신부는 제레미의 영혼을 구원하는 신앙적 이유와 더불어 육체적으로 사랑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신부는 자비를 베푸는 조건으로 그가 마을에 머물며 매일 만나자 청한다.
이 고해성사는 표면적으로는 신부가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구조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제레미는 자신의 성적 매력이라는 권력을 갖고 있고, 신부는 종교적 권위에도 불구하고 욕망 앞에서 무력한 존재로 낮아진다. 살인 은폐와 육욕 충족, 이 둘은 기이한 공생관계를 형성한다.
뛰어내리려는 제레미에게 신부가 늘어놓는 즉흥 설교는 진실되지만 위선적이다. 노신부의 입으로 미세리코르디아의 본질을 설명할 때, 우리는 그것이 진짜 자비를 논하는 것인지 말만으로 믿을 수가 없다.
제레미는 관객이 몰입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그의 내면은 불투명하다. 과거사도 명확하지 않고, 성적 정체성도 유동적이다. 심지어 뱅상을 죽이고는 사이코패스처럼 침착하게 시체를 처리했는데도 자수나 자살, 도망 등을 모색한다. 뱅상을 묻은 곳 위에 피어난 버섯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선 죄책감을 보이며 역겨워하기도 하고.
제레미를 따라 진행됨에도 이런 모습에 관객은 그에게 애착을 갖는 게 어렵다. 그가 과연 진짜 무감각한 것인지, 아니면 극도의 충격 상태에 있는 것인지 끝나는 순간까지 모호하다.
주인공 제레미보다 더 흥미로운 게 있다. 바로 마을 사람들이 제레미에게 보이는 반응이다.
미망인 마르틴은 그를 아들처럼 대하며 자비를 베푸는 듯하지만 결국 자신의 모성적 욕망과 육적 욕망까지 투사한다. 신부는 구원받아야 할 영혼을 발견한 종교적 사명감으로 자비를 베풀려 하지만 육체적 성애에 사로잡힌다. 각 인물은 자비를 내세우지만, 제레미를 통해 자신의 욕망과 결핍을 채우려 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인물들의 욕망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왜 제레미가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인물들이 도덕의 경계를 허물고, 그에게 욕망을 느끼는지에 대한 납득할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욕망의 양태를 보여준다. 마치 숲을 보여주듯, 세상을 이루는 자연스러운 풍경인 양 프레임에 담는다.
보다 보면 제레미는 주변인의 욕구에 맞춰 다르게 행동하게 됨을 알아챌 수 있다. 주변인의 욕망을 투사하는 과정에서 더욱 주인공은 불투명해진다. 우리는 주인공의 내면과 진심, 욕망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 이름과 욕망을 함께 달아 붙인다. 친구도 다 같은 친구가 아니며, 지인과 애인도 다 같은 욕망을 두고 맺어지지 않는다. 이에 관해 여기 내 필명이 된 생선의 이름을 담은 시가 있다. 이 물고기는 이름이 엄청 많다. 붙여지는 이름은 모두 타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더욱 어울린다. 김주대 시인의 <명태>라는 시다.
명태
살아 있을 동안 너는 어떤 이름으로도 살지 않았다
물결의 부드러운 허리를 물고 힘차게 지느러미를 흔들던
너는 푸른 파도였고 끝없는 바다였다
수평선 위로 튀어오르는 무명의 황홀한 빛이기도 하였고
어느날 명태, 라는 이름의 언어가
너의 깊은 눈에서 바다를 몰아내고 파도인 너를 음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후로 너의 입과 눈에서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였다
명태라는 이름은 너의 주검을 요리하고 싶은 욕망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호명에는 음흉한 욕심이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누가 벗이여, 라거나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것이
그 죽음을 제 입맛에 맞게 요리하고 싶다는 얘기는 아닐는지
모든 호명에 음흉한 욕심이 감추어져 있을지 모른다는 것. 제레미에게 권하는 모든 자비가 사실 각 인물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허울이라는 것이 이 시 속 '호명'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아닐까.
'미세리코르디아'는 타인의 비참함에 마음을 쓰는 것이라는 뜻이지만 영화에서 자비는 전혀 다른 의미로 호명된다. 마르틴이 마지막 장면에서 제레미를 침대로 받아들이는 행위. 신부가 제레미를 인도하고자 하며 육체관계를 바라는 욕망. 자비로 호명된 도움의 손길은 자신의 욕망을 포괄하는 뒤틀린 '자비'이다.
그런 의미로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자비란 실재하지 않는다. 그저 공허한 상징이다. '자비'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욕망을 내세우는 인물들의 행동은 블랙코미디 극이다.
결국 <미세리코르디아>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과 결말은 제레미의 내면처럼 명확하지 않다. 관객은 일관되지 않은 듯 보이는 제레미의 행동과 주변인들의 욕망에서 선뜻 답을 내릴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자비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제레미처럼 망설이고 갈등하며 결국 불완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비'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자비를 베풀기 어려운 인간 존재의 한계와 동시에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망일지도 모른다.
Miserere Misericordia.
자비로써 자비를 베푸소서.
어떤 방식으로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인가.
영화는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지속하게 만든다. 블랙 유머는 언제나 찜찜하고 불편한 지점에서 사람을 웃긴다. 나는 웃으며 자문한다. 진정한 자비를 베풀 수 있을까. 내 욕망을 자비로 덮고 있지는 않은가. 거울 앞에서도 나는 웃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