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라짜로(2018)
진실로 선한 사람을 마주한다면 우리는 알아볼 수 있을까?
아님 우리가 그 선함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백하건대 <행복한 라짜로>를 보면서 초반에 라짜로가 흑막형 인물이 아닐까, 끝날 때쯤 반전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며 봤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 후, 암전이 되는 그때까지 그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유일한 흑막은 의심하던 내 마음이었다.
창작물에서 시대적 배경을 막론하고 온전히 선하기만 한 메인 캐릭터는 흔치 않으며, 그런 성격은 재미도 없다고 생각한 나한테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준 라짜로. 그 이름의 기원은 성서 속 나사로(Lazarus)이다. 나사로는 한번 죽었다가 부활한 인물로 극 중 라짜로의 행적과 비슷하다.
하지만 볼수록 그의 이름은 단순히 극 중 행적만을 가리키는 게 아닌 듯싶었다. 그의 이름은 이 시대에 현대인이 잃은 지 오래인 '선'의 부활과 그 '선'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의 부활이 요원함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추측해 본다.
이탈리아의 한 산간벽지. 무성히 자란 담배밭을 일상의 터전으로 하는 마을, 인비올라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폰시나 데 루나 후작 부인의 담배밭에서 소작하며 산다. 그곳에는 모두가 심부름을 시켜도 군말도 불평도 없이 심지어 불쾌함도 없이 부탁을 들어주는 소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라짜로.
사람들은 별 사소한 일부터 힘쓰는 일, 귀찮은 일, 번거로운 일 등등 모두 라짜로를 시킨다. 그는 바보 같다 싶을 정도로 순종적이다. 처음엔 그가 진짜 바보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멍청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악의조차 악함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그런 마을에 어느 날, 별장을 찾은 후작 부인과 그녀의 아들 탄크레디가 등장하면서 마을은 소동한다. 반항적인 탄크레디는 라짜로와 친해지고,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자 가짜 납치 소동을 벌이고 만다. 이 일로 인비올라타가 어떤 곳인지 밝혀진다.
탄크레디를 찾기 위해 찾아온 경찰들에 의해 이미 오래전 신분제도와 소작제가 법적으로 금지된 것이 폭로된다. 마을 사람들은 평생 속아 살았다는 충격에 마을에서 탈출한다. 이런 혼란 속에서 라짜로는 절벽에서 추락한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찾지 않는다.
그가 과연 죽은 것일까? 영화는 라짜로가 절벽에서 죽은 채 끝나지 않는다. 그가 깨어날 때 계절이 바뀌어 있고, 시간이 흘러 있다. 늑대 한 마리가 그를 발견한다.
"늑대가 그를 발견한다. 그에게 다가간 늑대는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잡아먹으려 하지만 처음 맡는 냄새에 멈춘다. 무슨 냄새였을까. 그것은 선한 사람의 냄새였다."
이 설화는 성 프란치스코의 일화를 각색한 것으로 절대적 선이 가진 힘을 보여준다. 죽음에서 돌아온 라짜로는 성서 속 나사로가 부활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가지고 왔듯 변치 않은 모습과 더불어 선함을 유지한 채 현대 사회로 나오게 된다.
도시에서 라짜로는 인비올라타에 살던 안토니아의 가족과 재회한다. 이들은 도로변 판잣집 같은 곳에서 거주하며 좀도둑질과 사기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과거 마을에서 사람들을 착취했던 니콜라는 이제 이주노동자들을 경쟁시키는 일자리 중개인이 됐고, 라짜로는 성인이 된 탄크레디를 찾아 나서지만, 이미 라짜로를 잊은 지 오래였다.
노예제에서 해방된 마을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살게 됐는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시대가 바뀌었어도 사회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듯, 이들도 그저 후작 부인의 직접적 착취에서 현대의 시스템 밑바닥에 자리했을 뿐이었다.
세상에 그들의 자리는 없었다. 라짜로와 안토니아의 가족들은 탄크레디의 집에서 쫓겨나고, 성당에서마저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미사라며 내쫓긴다. 그러나 그들을 뒤쫓아 성전을 벗어난 아름다운 찬송곡의 운율은 라짜로를 따라온다. 자본과 세속에 가려졌을지라도 신성이 선함을 좇는다는 슬픈 진리의 메타포가 아닐까.
결국 라짜로의 선의와 순수함은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최후의 순간, 그의 슬픔은 냉소나 분노가 아닌 연민이었으리라. 라짜로의 눈물은 눈먼 세상을 위한 애도이자 동시에 정화의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단물은 다 빨리면서도 조금도 원래의 모습이 훼손되지 않는 라짜로. 그를 보면서 김기택 시인의 시 <껌>이 떠올랐다.
껌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 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 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 속에 겹겹이 구겨 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 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우주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 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고기 씹는 악력에도 짓이겨지지 않는 껌. 선명한 잇자국에도 찢어지지 않는 형태의 껌. 라짜로에 대해 이 시 속 껌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 제 한 몸 남들의 무심과 악의, 무시를 받아도 자기를 잃지 않는 모습.
나의 흑막이론을 가볍게 뛰어넘는 라짜로는 가장 평범하고 숭고해 보였다. 현실의 고통과 결핍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선함과 다정함을 믿는 믿음.
마지막 순간에 라짜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와 같이 세상을 원망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법하다. 마치 스데반이 돌로 맞아 순교당할 때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한 모습처럼, 신성을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불쌍한 현대 인간들을 위해 긍휼을 느끼지 않았을까.
작중 모든 인물은 라짜로의 선함을 이용만 하려 든다. 그는 자신이 이용당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용당해서 사람들이 안위와 편함을 누림에 그것으로 족했다. 나는 성인에 관련된 신화도 믿지 않고 착한 사람을 보고 감화받는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라짜로의 모습은 나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선함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인가.
순교자 혹은 성인 같기도 한 라짜로는 그들의 서사처럼 결국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전반적으로 우화적 요소가 가득한 이 영화에 이보다 더 우화 같은 결말도 없으리라. 성인 같은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교화하는 결말이었다면, 이건 현대와 동떨어진 신화적 판타지로 끝났을 테니까.
"오늘날 성자가 현대의 삶 속에 나타난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어쩌면 별 생각 없이 그를 내칠 것"
감독은 현대인들에게 선함을 그대로 볼 영적 시각이 없다고 말했다.
라짜로는 부활했다가 다시 결국 죽는다. 신성과 선함을 알아볼 눈을 상실한, 현시대의 눈먼 자들에 의하여. 나같이 선함을 믿지 못한 관객에 의하여. 한때 그처럼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하는 풍조가 유행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선함은 어떤 능력과 미덕보다도 강한 것이다. 질긴 것이다. 그리고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선함은 세상에서 가장 갖기 어려우면서도 신성 자체의 마음이다. 영화는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라짜로를 알아볼 수 있는가? 그리고 그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