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에 뿌리내린 묵시록, 그 후의 재창세기

열대의 묵시록(2024)

by 명태

『소년이 온다』의 제목이 영원한 현재형인 이유가 떠오른다. 어떤 것들은 영원히 온다. 아니, 우리가 영원히 간다. 인간 서사의 완성, 이상향 세계 추구, 모든 학문, 그리고 민주주의.


<열대의 묵시록 Apocalipse nos Trópicos>은 브라질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는 비단 브라질 내의 문제만이 아니다. 물론 민주주의가 완벽한 정치체제라고 말할 수도 없다. 주인이 되어야 할 인간은 불완전하며, '국가구성원'이 단일 개체로 묶일 수도 없기에. 그러나 독재나 왕정보다는 민주국가에 더 많은 자유가 있기에 바람직한 정치체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세계적으로 독재가 고개를 점점 들고 있다. 독재는 생존권과 인권에 대한 위협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완벽·단일화에 대한 욕망이 독재에 대한 열망으로 나타나는 인간이란 종이, 다른 한편으로는 다원적이고 다양하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가. 감독은 이런 시선으로 다큐를 담아냈으리라. 자신이 속한 브라질 사회에서부터.



페트라 코스타 감독의 <열대의 묵시록>은 브라질에서 복음주의 기독교가 극우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작품이다. 이 종교의 부상 후 브라질 민주주의가 어떻게 위협받게 되었는지를 관찰한다. <열대의 묵시록>을 보면 브라질의 근현대 역사를 조금 알 수 있다.


브라질은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1년간 군사독재를 경험한 역사가 있다. 점진적 민주화를 거쳐 1988년 새 헌법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한 브라질은 룰라 대통령 집권 후 사회 정책으로 많은 이들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기득권이라 할 수 있는 사회층의 불만이 조금씩 쌓여간다. 이때 등장한 것이 '브라질 복음주의 교회'이다.


복음주의자들은 브라질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며 2018년 극우 보우소나루의 당선에 핵심 역할을 했다. 브라질에 복음주의 개신교가 처음 자리 잡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부터이다. 전통적 가톨릭 지배 아래 있던 브라질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는 미국의 수출품이었다. 냉전 시기의 워싱턴에서 좌익 가톨릭 해방신학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개신교 선교사들을 파견했다는 것이 CIA 문건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확산된 복음주의는 브라질 자체 내에서 극우화되어 "인류 역사상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적 변화 중 하나"로 급속 확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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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형 교회들이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미디어 제국을 구축하고, 이는 무시 못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교회의 목사들은 설교와 집회에서 보우소나루를 찍으라고 대놓고 말하기도 한다. 정교분리가 이렇게 와해되기 시작한다.


그들은 성소수자 인권 반대 집회와 안티 페미니즘, 낙태 금지법들을 신과 자체적 교리를 결부해 정치적 설교를 이어간다. 초대형 복음주의 교회 목사는 대통령과 대법관, 상원 의회에 직접적으로 대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는 치명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은 물었다. "민주주의는 끝나고, 신정정치가 시작되는가? 이 모습은 어떠할까." 현재도 극심한 양극화 현상을 겪는 브라질 사회가 앞으로 얼마나 더욱 극화될 것인지 감독은 두려워했다.



브라질이 겪은 상황은 한국도 최근 겪은 바가 있다. <열대의 묵시록>에는 브라질에서 일어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다 담겨있다.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것을 경찰들이 강제로 막는 것. 광신도와 극우세력이 대법원에 침입해 훼손하는 것. 부정선거론. 날조된 허위 비방이 담은 무기화된 여성들의 불안. 기득권층의 몰락 예고. 사회가 혼돈으로 빠질 것이라는 선동.' 낯설지가 않다. 한국도 최근 12.3 계엄을 더불어 이 모든 것을 겪어 왔고 또 겪는 중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개신교계의 정치적 동원이 브라질 복음주의와 유사하게 작동하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알고리즘을 타고 확산되고 있다. 알고리즘과 선동에 세뇌된 세력들이 증식하고 그것은 현실 세계의 폭력으로 분출된다.


이러한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같기 때문이다. 권력욕, 집단 정체성에 대한 욕구, 확실성에 대한 갈망. 이 보편적 갈망들이 비슷한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민주주의가 더욱 소중하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이러한 본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려는 시도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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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 (우)자이르 메시아스 보우소나루


지우마 호세프의 집권, 2016년 호세프 탄핵, 2018년 극우 보우소나루 집권, 그리고 룰라의 재집권으로 이어진 브라질은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신이여, 우리를 보살피소서" 부르짖는다. 복음주의 극우화 세력도, 노동당 룰라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다르지만 같은 신을 다른 이유로 찾는다.


<열대의 묵시록>은 이러한 위기가 단일국가만의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다. 세계적 민주주의 위기에 독재와 신정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조명한다. 불완전하기에 더욱 갈망해야 할 미완의 민주주의가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타들어가는 갈증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시,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생각났다.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서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지난 12월, 어릴 적 교과서로 접한 이 시에서 왜 민주주의를 '타는 목마름'이라 칭했는지 절절히 통감했다. 브라질의 사람들도 한국의 나도 그리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도 이 '타는 목마름'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에는 취약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려는 노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본질임을 <열대의 묵시록>은 타는 목마름을 삼키듯 보여준다. 이 시가 쓰였을 당시의 시의적절함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O, Deu!"

<열대의 묵시록> 처음에 간절히 하나님을 부르짖는 음성으로 시작되는 게 인상 깊다. 신과 구원은 가장 남용되는 개념이다. 인터뷰에서 룰라는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의 믿음은 무시할 수 없는 거니까.


나는 신실함과 거리가 먼 성격이다. 그러나 신념과 믿음은 있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건 위험한 신념보다도, 전복할 수 없는 절대우위의 가치를 내세우면 중심 없이 휘둘리는 마음이다.


룰라의 당선 후 복음주의자가 아닌 인구 구성원들은 "올레, 룰라!"를 외치며 눈물을 흘리며 감격한다. 그들이 흘린 눈물은 종교가 정치에 과도하게 영향을 끼쳐 신정 국가를 꿈꾸던 이들의 눈을 씻겨줬을까.


마지막 대법원이 극우의 난동으로 파괴된 곳을 카메라가 비춘다. 그리고 깔리는 감독의 나레이션은 이렇다.

"민주주의가 관대함에 있어서 최고의 형태일 수도 있다고요.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적과 공유하겠다는 결의를 선언하는 것이죠. 인류가 이토록 역설적인 태도에 도달했다는 것은 실로 경이롭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곡예처럼 아슬아슬하며 부서질 듯 연약하죠. 똑같은 종이 그것을 없애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 복잡한 수행이니까요. 어쩌면 미래의 어느 종말에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이 공간이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다수의 뜻도 신의 뜻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요. 무자비한 힘으로부터 약한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음을요."


자신의 존재를 적과 공유하겠다는 결의라니. 실로 곡예처럼 아슬아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인간이 불완이고 미완인 자체가 인간 찬가의 기조이듯, 나는 '완전한 민주주의' 또한 서로 병치할 수 없는 단어의 조합이라 생각한다. 이는 고통스럽고 아름답다. 영원한 미완성과 불완전을 이룩하는 우리가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모습이야말로 인간다운 아름다움이 아닐까.


묵시록, Apocalipse.

아포칼립스는 보통 묵시와 종말을 뜻하는 단어지만, 그리스어로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 (apokálypsis)' 는 세상의 종말이 아니다. 본래의 뜻은 '드러냄', '계시', '덮개를 걷다' 즉, 숨겨진 것을 밝힌다는 의미다. '덮인 것을 밝혀내고 눈을 뜨게 하는 계기'이다.


고로 <열대의 묵시록>은 이제 열대 속에 잔재했던 것들을 드러내고 눈을 뜨게 하는 기회라는 제목도 된다. 이 메시지는 절망이 아니라 책임과 우리가 가진 힘을 상기시켜준다. 극우 정부 후, 브라질은 여전히 혼돈스럽지만 그럼에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재창세를 이어갈 것이다. 브라질 뿐 아니라 세상 곳곳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우리에게도 눈을 뜨는 묵시가 필요하리라. 또한 믿는다, 재창세가 계속되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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