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1993)
나는 이 영화를 '낳음 당했다'는 말로 인해 보게 되었다. 그 글에서는 '낳다'와 '당하다'의 결합이 사전적인 정의로 멈출 수밖에 없는 단어의 조합이라고 표현했던가. 발랄한 아이가 개구장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포스터. 이렇게 귀여운 아이에게 저런 처절한 표현이 걸맞을지 궁금했다.
영화 <가버나움>(2018)에서는 정말로 '낳음을 당한' 아이가 주인공이고, 이 아이는 자신의 부모를 고발한다. 난민과 빈민의 현실을 담은 그 영화에선 '낳음을 당하다'라는 표현이 지당했다.
그런데 이렇게 명랑해보이는 포스터와 풍광에서 '낳음을 당하다'라니.
보고나서는 한번쯤 자신의 존재와 성장에 대해 성찰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볼 수밖에 없었을 영화였다고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주인공 '렌'이 아빠, 엄마와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으로 시작된다. 세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 식탁, 소소한 대화들이 얼핏 행복한 가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밖에선 비가 내리고 아빠는 비 내리는 바깥을 멍하니 보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렌이 건넨 말은 엉성한 대답으로 얼버무려지고, 대화가 계속 끊긴다. 렌은 '단란한 가족'의 일상적 대화를 이어가려 하지만, 이미 이혼을 결심하고 별거 직전 날 부부의 식탁은 싸하기만 하다.
아빠가 집을 나가고 렌은 엄마가 정한 가족 규칙에 마찰을 빚는다. 아빠와 나누던 것들의 단절과 갑작스런 엄마의 개입. 그리고 학교에선 편부모 가정의 아이와도 싸우게 된다.
하지만 이 전학 온 아이는 렌의 사정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고 둘은 서로의 부모 이야기를 하며 친해진다. 엄마와의 냉전도 아빠의 무심도 힘든데, 전학 온 아이를 따돌리려 하는 반 친구들로 인해 렌은 기어코 학교에서 대형 사고를 치게 된다.
이혼으로 가족의 관계 역학이 뒤죽박죽되어 버린 상황. 렌은 방학식 날 자신의 반항적 행동으로 모인 가족에게 묻는다.
"왜 낳았어? 왜 나를 낳았냐고?"
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 아마 그 애의 안에선 자신을 지탱하는 땅이 무너진 기분이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가족은 늘 그랬듯 여름축제가 있는 비와호수로 여행을 가게 됐지만, 영화 내내 피하고 싶은 것으로부터, 아니면 닿고 싶은 곳을 향해 달리던 렌은 여기서도 현실을 피해 달린다.
'빨리 어른이 될게!'라는 렌의 외침. 렌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던 엄마는 오열하고, 렌은 밤새 화염이 이글대는 축제와 정글 같은 숲을 헤맨다. 그리고서 추억이 환영처럼 오버랩되는 바닷가에 도달해 '축하합니다'를 계속 외친다.
환영이 사라지고 엄마와 만나며 아침이 온다. 렌은 자신의 여름방학을 작문으로 발표하고 큰 박수를 받는다. 그리고서 아이는 미래로 간다.
렌이 가족이란 기반이 흔들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는 장면은 홍지호 시인의 <월요일> 속 존재를 신에게 하려는 질문을 떠오르게 했다.
월요일
처음은 자꾸 지나간다
관대한 척을 하면서
키스가 있었다
하루종일 숨을 쉴 때마다
당신이 숨쉴 때 나는 냄새가
들락날락거렸다
바퀴가 터진 스쿠터처럼
처음은 지나갔고 이제 키스를 해도
당신의 숨이 들락거리지는 않는다
처음이 지나간 후에도 나는 자꾸
처음이에요 라고 말하게 되었다
처음이라고 하면 선생이 되어주니까
선생들이 늘어가고
미숙함을 이해해주었다
초범이라는 단어가 형량을 줄이는 것처럼
데뷔작을 태워버리고
차기작을 발표한 작가가 있다면
그리워하겠지
형량은 늘어날 것이다
찾고 있던 신에게
질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처음으로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
나를 만든 건 처음이지요?
세상을 만든 것도 처음이지요?
그러면
봐줄 수도 있을 거 같다
"이 아이, 태어나서 행복할까?"
영화에선 렌 부모님의 후배로 나오는 커플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그러게, 낳는 것과 태어나는 일은 동시에 일어나지만, 동의는 한쪽에서만 이뤄진다. 태어난 존재는 그저 태어남을 당한 것이니까.
렌은 이 시 속 질문을 신 대신 엄마에게 묻는다. '부모가 된 건 처음이지? 나도 자식은 처음이야, 그러니까 봐줄 테니 같이 미래로 나아가자'라고. 우리의 삶도 처음은 자꾸 지나가고, 미숙함으로 세상에 관대하게 넘어가는 시기는 점점 지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와 신을 원망한다. 나도 나로 사는 게 처음이지만 그들도 그 역할이 처음이라면 같이 나아가는 게 최선의 타협이지 않을까.
<이사>의 렌처럼, 사실 나는 부모님께 '왜 나를 낳았냐?'라고 몇 번이고 질문한 적이 있다. 반항심에서도, 내 존재론적 회의감에서도, 진짜로 궁금해서도 물은 것이긴 했지만 듣는 부모님의 심정은 그리 좋지 않았으리라. 대답은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마 만족할 대답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 존재 이유와 타당성에 대해 수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과학자들이 연구를 해왔다. 그중 우리가 우연히 생겨났다는 관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수억 년 전, 다양한 생명체가 폭발적으로 등장한 캄브리아기 대폭발과 비슷하게. 그런 우연의 형태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확률은 너무나 희소해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너무 특별하게 느껴진다. 자아와 지각이 있는 신피질의 감각은 그런 확률에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그런데 이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는 의미를 필요로하는 뇌를 가지도록 진화했고, 이것은 지금의 인류를 만들었으니.
렌은 자기 과거의 회상을 태우고 지우며 여름 축제를 파괴와 재정립의 시간으로 보낸다. 그러고는 외친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그런 신비롭고 자연스러운 성장통을 겪은 렌은 돌아와서 이런 말은 남긴다.
"얘야, 어디에 가니?"
"미래에요!"
그러곤 어느새 교복을 입은 아이가 되어 엔딩크레딧에 멈춰서 사라진다.
존재론적 고민과 성장통, 그리고 인류의 진화 과정과 '나'라는 우연.
우리의 과거는 우리를 만들고 우리는 과거를 또 만들려 오늘을 산다. 우리는 미래로 간다. 과거를 다 잊을 수는 없겠으나 한 손에 잡히는 한 줌의 추억을 꼭 쥐고서, 미래로, 미래로. 그렇게 도착한 미래를 맞이했으니 '축하합니다'라고 나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렌이 그랬듯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내가 꼬옥 안아줄 수 있게, 나도 미래로 가려 한다. 그리고 도착해서는 과거와 미래의 나에게 축하한다고 인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