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티리얼리스트(2025)
사랑도 흥정이 가능할까?
지겹게 듣던 말들이 있다. '가난이 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창문으로 나간다.'든가, '결혼은 비즈니스 관계'라든가. 물론 대대로 내려오는 혼인제도에는 경제권을 기반하여 사업 같은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랑은? 사랑도 손익을 따지는 게 가능할까? 그럼 수지타산을 따지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Materialists. 물질주의자라는 뜻이다. 현대 로맨스 장르에서 이런 제목을 쓴다면 내용은 예상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주의적 관점을 어떤 식으로 설득력 있게 풀어나가는지 궁금했다.
<머티리얼리스트>의 주인공 '루시'는 이런 말을 한다.
"데이팅은 어려워요. 리스크가 있죠, 준비해야 할 것도 있고 스킬도 필요하고요. 근데 사랑은 쉬워요. 그냥 우리 삶에 갑자기 걸어 들어오니까요."
'물질주의적(materialistic)'이며 '계산(math)'을 멈추지 못하는 루시는 사실 누구보다 사랑이란 감정의 '그럼에도 받아들이는 점'을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루시는 결혼정보회사, 소위 말하는 결정사의 매칭 파트너다. 그것도 굉장히 실력 있는 매니저급의 직원이다. 그녀는 길거리에서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사람에게조차 말을 걸어 명함을 내밀며 고객을 유치하는 프로이다.
그런 그녀는 자신이 성사시킨 커플의 결혼식에 가게 되고, 여기서 두 남자를 만나게 된다.
한 명은 업계에서 말하는 '유니콘'이라 하는 재력·외모·집안·성격·직업을 두루 갖춘 사모펀드 매니저 '해리'. 다른 한 명은 한때 열렬히 사랑했으나 가난으로 인해 헤어지게 되고 지금은 결혼식장 케이터링 알바를 하는 구남친 '존'.
결혼은 비즈니스라고 강조하는 루시와 해리는 만남을 지속하고 사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은 루시의 곁에 있어 준다. 영화에선 해리로 인해 얻는 루시의 풍족스러운 삶과 존의 가난하고 현실적 삶이 대비되어 그려진다.
루시는 회사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충격을 받게 된다. 루시는 자신의 고객들을 상품처럼 말하면서도, 내심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루시는 자신 또한 상품이며 계산으로 수지타산을 매기고 있던 것이다.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루시는 해리와의 비즈니스적 결별을 고하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곁에 있어 주던 존에게 찾아간 루시. 날 미워하지도 않느냐고, 속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묻는 루시에게 존은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답하며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널 사랑하는 걸 멈출 수가 없고, 너를 구걸하는 처지야. 네가 주름지고 머리가 희게 세어가는 모습이 보여, 나는 네 모습을 그리는 걸 멈출 수가 없어."
루시가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타나자, 존은 루시에게 최종 제안을 건넨다. 협상 불가능한 제안으로, 너를 평생 사랑할 거라는 종신 보증을 서겠다고.
해리와의 만남과 이별에선 비즈니스적 악수를 건네던 루시는 존의 제안에는 키스로 답한다.
마지막에 유인원에 대한 꿈을 꾼다는 루시는 최초의 결혼이 어떻게 이어졌을지 그린다. 그리고 그 유인원처럼 풀로 만든 반지를 받는다. 사랑은 계산을 초월하는 일임을 받아들이며 환하게 웃는다.
사랑할 수밖에 없어 하는 사랑은 내게 불가해한 면이 크다. 그런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지속이 언제나 문제이지 않을까도 싶었다. 이별하고도 상대를 보내지 못하는 사랑, 언제나 곁에 있어 주는 사랑, 그리고 늙어가는 모습까지도 그려보며 사랑할 거는 예감을 느끼는 사랑.
루시와 존의 풀꽃반지에는 서덕준 시인의 <약속>만큼 어울리는 시가 없지 않을까.
약속
우리 약속 하나 할까요?
우리 마음의 씨실과 날실이 더욱 촘촘해지기로 해요.
서로에게 범람하기로 해요.
달가운 침범을 일삼기로 해요.
삶의 건너편까지 마중하기로 해요.
서로의 여백을 아름다운 엔딩으로 메꾸기로 해요.
당신이 해가 되는 날이면 내가 달이 되어주기로
손가락을 장미 덩굴처럼 걸고
우리 약속할까요?
이 시를 읽으면 자연스레 풀꽃반지 같은 풀내음이 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유인원이 내밀었던 풀꽃반지. 루시가 꿈꾸던 최초 사랑의 모습. 엔딩에서 존이 건네는 풀꽃반지의 향이 거의 맡아지듯 한다. 거창한 다이아링으로 청혼하려 했던 해리와 비교했을 때, 너무 초라하지만 다이아는 향기가 없다. 사랑의 향기는 풀꽃반지에 있다.
물질주의 시대, 결혼은 사업이고 사람은 상품이며 사랑은 매출이 되는 이때. 존이 내미는 사랑의 종신 보증만큼, 소박하지만 가장 인간적이고 낭만적인 약속은 서로 촘촘해지기로 하는 약속이 아닐까.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그것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고, 합리적 선택을 추구하면서도 비합리적 감정에 이끌리는 모순. 결혼은 비즈니스라고 하며 미혼이 좋다고 떠들면서도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이상한 현대 사람들. 사랑이란 감정의 원초적이면서도 고차원적 면을 간직한 사람들.
물질주의 시대를 사는, 물질주의적인 나는 인간적인 것,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의 가치가 더욱 값지다고 느껴진다. 속물의 모순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현실을 냉소로 보내고 싶지 않다. 꼭 결혼이나 연인이 아니더라도 '사랑의 종신 보증' 설 날이 있으면 좋겠다. 계산을 넘어서는 것이 세상에 분명히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