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여름(2025)
"손녀의 결혼식보다 남자 친구의 49재에 가고 싶다"
영화<첫여름>의 이 한 줄 카피에 벌써 엄청난 서사가 담겨 있다. 그런데 단편 영화라니. 이런 다층적인 면의 서사를 30분의 러닝타임 동안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내 기대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함의한 <첫여름>은 영롱한 나비의 날갯짓처럼 나를 홀렸다.
이 영화는 자아, 노인 돌봄의 문제, 원치 않았던 결혼제도 속의 여성과 여성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기대의 무게, 노인의 섹슈얼리티 등 현 한국 사회의 다층적인 면을 다 품은 '영순'으로 보여준다.
영순은 남자친구인 '학수'에게서 한동안 연락이 없던 중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로부터 49재라도 오시겠느냐 연락을 받는다. 그 사이 영순의 하나뿐인 손녀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필이면 손녀의 결혼식 날이 바로 학수의 49재 날이다.
손녀의 결혼식 대신 남자 친구의 49재에 가겠다고 말하는 순간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아니라 평생 억압당해 온 자아의 분출 같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개인의 감정과 선택을 해보려는 때, 당연히 딸의 거센 반대에 부딪힌다.
영순은 그런 딸에게 말한다. "너는 엄마가 이해가 안 되니?"
가부장적 가족제도 안에서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 할머니로만 존재해야 했던 영순. 가정폭력에도 이혼하지 못 한채, 가정을 떠나지 않은 영순. 이제 늘그막에 자신의 자아대로 춤추는 것을 즐기던 영순. 그러나 다시 또 그런 속박에 묶이는 영순.
춤출 때 한껏 꾸미던 그녀의 모습은 미소로 가득하지만, 손녀의 결혼식을 위해 고루한 한복을 입을 때는 얼굴이 잔뜩 굳어있다. 그녀는 누군가의 무엇이기 이전의 한 명의 사람이고 개성 있는 여성이다. 세상은 '노인 여성, 할머니'의 개성 있는 삶에 대해 얼마나 관대한가. 아마 영순이 처한 삶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첫여름>에선 관혼상제가 교묘히 배치되어 나온다. 손녀의 결혼식은 가족 공동체가 요구하는 '당연한 선택'으로, 학수의 49재는 개인적 애정에 기반한 '일탈적 선택'으로 말이다. 학수와 영순의 서사를 그저 '노인네의 주책' 정도로 치부하는 모습은 이 배치와 딸의 언행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영순의 갈등은 한국 여성들이 평생에 걸쳐 겪어온 딜레마의 압축판 아닐까.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일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직도 여성에게 유효한 주홍 글씨이다.
하지만 영순의 선택은 이러한 관습적 도덕성에 균열을 낸다. 그녀는 더 이상 가족이 원하는 할머니의 역할을 연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평생 돌봄노동을 수행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온 여성이, 노년에 이르러서야 자신만의 '첫여름'을 맞이하려는 것이다.
영순과 학수의 회상 장면에서 정사 이후 서로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허심탄회하게 노래가 나오면 춤추고 싶다고 말하는 영순에게 학수는 가족에 대해 묻는다. 그런 걸 왜 묻냐고 하니, 우리가 살아온 날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길기에 당신을 알고 싶어 묻는다는 답이 돌아온다.
요즘은 그래도 늦은 것은 없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렇게 믿어서 말하는 것일까.
여전히 사람들은 어떤 나이 때엔 꼭 이것을 해야 한다고 믿고 타인을 압박한다. 취직과 결혼, 육아와 양육, 돌봄과 나이에 걸맞은 처신 따위. 우리가 이런 관습의 주체가 되어 이런 압박을 내재화 해야할까?
영순이 결국 손녀의 결혼식을 포기하고 49재의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은 살풀이이자 '자신'을 불러오고 받아들이는 초혼식의 춤 같게도 보였다. 그것은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고로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은 언제든 늦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영순의 첫여름은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황인숙 시인의 <거울들>처럼.
거울들
저 실컷 놀아서 목이 쉰 것 같은
개구쟁이 뱃사공 로드 스튜어트가
로드 데이빗 스튜어트가
하, 쉰 살이 넘었다니!
위안이 되는군.
뭔지 몰라도
자기도 모르면서
너는 모른다고 외치는
Hall and Oates도
그쯤 됐을 거야, 아마.
이 년 후면 이 몸도
그토록 능멸했던 연세가 되시는구나.
(쌤통이라고?)
아, 새 신을 신든 헌 신을 신든
팔짝 뛰고 싶구나.
여기, 변변히 젊어본 적 없는 자,
고이 늙지 못하다.
나의 역할을 요구하는 나의 수많은 거울들.
그녀는 비로소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진 노년에서, 얼마나 새 신이든 헌 신이든 신고서 춤을 추고 싶었을까.
단순한 '노인네의 주책'으로 취급하는 딸에게 '너는 이혼도 해봤지만, 나는 해보고 싶었던 그 이혼도 못 해봤다고' 외치는 장면은 시에서 '변변히 젊어본 적 없는 자, (사회의 기대부응대로는) 고이 늙지 못한다.' 하는 말 같다. 하지만 나는 봤다. 영순이 얼마나 고운 모습의 노년을 맞이했는지를.
사람의 생이 얼마나 짧은지, 매년 뉴스와 주변을 통해 체감한다. 삶은 우리의 자아실현 하기에도 짧다. 시의 마지막 연처럼 영순이 자조 섞인 마음으로 딸에게 외쳤을지언정 나는 봤다.
영순은 사회가 바라는 할머니의 모습이 아닌, 그녀 자신의 춤을 출 때 가장 아름답다. 그 춤사위에 모든 세월과 한을 훌훌 날려버리는 모습은 그녀의 나비 브로치보다 더 빛나고 생생하다.
오롯이 나라는 존재로 맞이하는 첫여름의 눈부심. 그리고 삶의 끝단에서 여전히 반복되는 질문, 한 여성의 욕망과 정상성 속박 사이의 대치에서 따르고 싶은 대로 따라도 되느냐는 답없는 물음.
<첫여름>을 단순한 노년의 로맨스로 결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결혼과 가족에 대한 굴레를 노년에서야 벗어나고 싶던 한 여성의 관점으로 봤다. 자신을 옭아맨 관습과 돌봄노동의 강요, 자신의 자아에 대한 인정이 없음을 그녀를 보며 나도 느꼈다. 노년이 되어 자신에 욕구와 삶에 진심이고 싶은 한 개인의 회한은 늙어갈 모두가 느낄 수밖에 없는 바가 아닐까.
자아의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의 미래는 노인이다. 흔히들 하는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라는 말은 사회 건설적 측면이지, 개인의 이야기와 거리감이 있다. 우리는 다 늙는다. 우리의 정체성은 어떤 역할이나 대상화되어 존재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과연 어떻게 늙고 싶은가, 그리고 그 사회를 지금부터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이 30분 남짓한 러닝타임 동안 나는 충분히 솔직해졌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현존하며, 미래에도 있을 '영순'을 위해. 나부터 마음이 바뀌어보리라. '변변히 젊어보지 못했으면 변변히 늙어보리. 그래서 고이 늙고 곱게 살리라' 시의 마지막 연을 바꾸겠다 결심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