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공되지 않은 건축물, 삶

브루탈리스트(2024)

by 명태

사실 골재가 그대로 드러나는 건축을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는 깔끔한 마감과 인테리어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브루탈리즘 건축은 조금 다르다. 골재와 재료의 날 것의 미를 드러내 공허하면서도 그 자체로 완성감이 있어 나를 사로잡는다. 그런 건축물에 입을 벌리고 있을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브루탈리즘 건축을 만든 사람은 어떤 내면을 가졌을까.


사람이 만드는 모든 것은 만든 사람의 개성과 사상, 생각과 감정을 담고 있다. 회화, 조소, 음악뿐 아니라 건축도 그러하다. 성당이 그러하고 가우디의 건축이 그러하며, 영화 <브루탈리스트> 속 '라즐로'의 건축물이 그러하다.


<브루탈리스트>는 시대의 불운을 피할 수 없던 건축가의 삶을 담고 있다. 그의 삶은 그의 건축물에 고스란히 녹아든다. 긴 러닝타임 동안 라즐로의 삶이 하나의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처럼 진행된다고 느껴졌다. 건축물이 인생과 사람의 자아를 담는 부분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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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망한 건축가였던 '라즐로 토스'는 2차 세계 대전 후, 유럽을 떠나 미국에 이주한다. 그는 이민 초반 사촌과 함께 일하려다 틀어져, 그와는 손절하고 공사판에서 일하게 된다. 이민자의 냉혹한 현실 속, 피난 중 헤어진 아내와 조카와의 재회를 꿈꾸며 하루하루 육체노동의 삶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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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라즐로의 천재성을 뒤늦게 알게 된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이 건축물 건설을 제안하게 되며 라즐로는 다시 건축가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시대와 공간, 빛의 경계를 넘어 대담하고 혁신적인 그의 건축 설계는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서며 갈등을 빚는다. 아내와 조카가 미국으로 오게 되고서도 그의 인생은 평탄해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건축주의 폭력과 프로젝트 내 마찰로 인해 그의 건축물은 미완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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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폐허에서 나왔으나 삶은 여전히 전쟁 속 같던 라즐로. 그 미완 건축물의 의의는 마지막 건축 비엔날레 장면에서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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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파괴 이후 새로운 땅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그의 여정은, 폐허가 된 건물터에서 새로운 건축물을 세우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런 라즐로의 삶은 조카 '조피아'에게로 이어진다. 건축가가 죽고도 건축물이 남아 다음 세대에게 계승되듯 말이다.


미국에 와서 한마디도 하지 않던 조피아는 후일의 건축 비엔날레에서 삼촌 라즐로의 말을 인용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Don't let anyone fool you, Zsófia' he would say to me as a struggling young mother raising my daughter during our first years in Jerusalem, 'no matter what the others try and sell you, it is the destination, not the journey.' Thank you."
“'아무에게도 속지 마, 조피아.' 예루살렘에서 딸을 키우며 젊은 어머니로 힘겹게 살던 그 시절, 삼촌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꾸며 팔든, 중요한 건 여정이 아니라 목적지야.' 감사합니다.”

라즐로에서 조피아로. 건축물이 완공되지 않은 채로 다음 세대에게 넘겨지며 역사까지 계승되는 의미가 아닐까.



<브루탈리스트>의 건축물과 삶의 이야기는 조성래 시인의 <건물론>을 떠올리게 한다. 라즐로의 인생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도 피조물이 아닌 건축물과 가깝다.


건물론

나의 무신론은 텅 빈 건물이다 신이 나를 찾아와도 나는 여전히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는 공간이다 내가 신을 바라지 않는 것은 내 몸은 피조물이 아닌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간절하며 피조물은 간절한 만큼 때로 웃을 수도 있지만 또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지만 건축물은 버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는 것들로, 서로 기가 막히게 꽉 맞물린 정지 상태일 뿐이다 그러므로 건물은 비가 오면 비를 맞을 뿐이다 나의 눈은 그 처마 밑의 창문과도 같다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일 뿐, 혹은 머물다 갔다는 응시의 자리일 뿐, 건물은 머물거나 허무는 것이 전부며 건물에게 그 외의 일은 없는 것이다 누군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지상에 남아 있는 것을 건물이라고 한다 예수가, 닐 암스트롱이, 어머니가 밤하늘로 사라지더라도 남아 있는 지구라는 건축물은 여전히 둥글고 아름답다 모든 것을 버리고 새 도시로 도망쳐 온 내가 아직 그곳의 건물이어서 나는 건물 하나의 영혼이 되었다 건물이라는 육신을 두고 와 귀신이 된 자들이 투숙하는, 모텔이라는 건물의 지극한 건물성에 대해 나는 더러운 향수병을 가지게 되었다


'버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는 것'

우리의 인생은 완공을 향해 가면서도, 늘 보강하고 때로는 허물어 다시 짓는다. 이 과정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라즐로의 건축과 삶도 그러했다. <브루탈리스트>의 건축물은 그의 상처와 심리, 극복을 품은 삶-구조물이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역경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그의 삶은 브루탈리즘 건축물과 같았다. 그것은 무너지는 대신 후대에 계승되었다.


죽기 전까지 우리는 인생이란 건축물을 쌓는다. 새로 지으며 때로는 일부를 철거하고 또 쌓는 과정은 살아있는 삶에 필수 불가결하다. 건축가가 아닌 우리가 짓고 있는 삶은, 죽음 전까지 거듭되는 재설계와 시공을 거칠 것이다. 나는 이점에 매혹된다. 내 삶의 완공까지 나는 어떤 건축물을 짓게 될 것인가. 건축가의 삶을 담은 영화를 보며 나는 내 인생의 설계도를 또 조금 수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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