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불태워(2024)
서사가 아닌 감정의 파동이 전체인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러닝타임 속 서사가 직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파문이 계속 일렁이게끔 만든다.
<너는 나를 불태워>는 감각으로 전달되는 글자와 이미지의 총체 영상화다. 시간과 감정의 유영이다. 그래서 파편과 파동처럼 이 영화는 직선이 아니다. 내내 상(像)이 흔들리고 감정이 출렁인다. '사포'의 시가 fragment로 분류되는 것처럼, 영화도 파편화된 이미지와 다이얼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유기적이다. 파편을 주워가는 것은 퍼즐을 줍는 것과 같다.
어떤 결핍은 굳이 채우는 것이 필요 없다는 데에 동의하는가? 채울 필요 없는 결핍에 머물면서 온전한 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는 이탈리아 소설가 체사레 파베세의 자살과 그가 책에 남긴 메모에서 출발한다. 그는 『레우코와의 대화(Dialoghi con Leucò)』라는 책에서 <바다거품>은 영화화가 가능하다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바다거품>을 영상화하기 전 '사람은 박테리아의 군집'이라는 말을 듣고 작업이 시작된다. "나는 간절히 원한다, 너는 나를 불태워"라는 음성과 화면. 불태운다는 말에 흐르는 개수대의 물이 클로즈업되어 반복적으로 보인다. 영화 속, 각 인물은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가 되어 시적 대화를 나눈다.
사포는 고대 그리스의 서정 시인으로 실연으로 인해 바다에 몸을 던졌다 알려져 있다. 그녀는 방대한 작품을 썼으나 현재 작품은 <아프로디테 송가(Fragment 1)>외에는 모두 짧은 절로 된 파편으로만 남아있다. 브리토마르티스는 미노스의 구애를 피해 절벽에서 몸을 던진 님프이자 여신이다.
“젊은이, 사포의 노래를 알려주게나. 죽을 때 가져가려고.”
“당신은 인간일 때를 더 좋아하는군요. 그런데 이런 죽음을 원했군요. 왜 죽음을 원했어요?”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 실연으로 바다에 투신한 시인과 남성에게 쫓기다 바다로 뛰어내린 님프. 바다에 몸을 던진 자들의 다이얼로그가 지속된다.
"당신은 오래 바다를 원했어요?"
"바다에선 모든 것이 태어나고 모든 것이 죽는다."
미노스와 브리토마르티스 대한 이야기에서 남근 그림이 등장한다. 바다에 몸을 던진 것은 바다가 좋아서가 아니다. 사포에겐 '욕망, 번민'이 번복되는 인간으로 사는 것에 대한 포기이고, 브리토마르티스에겐 파괴적인 '남성성'에 대한 도피인 것이다. 그리고 둘의 대화는 죽음 이후의 새 시작을 상징하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모든 것에서 당신을 보고, 당신을 떠올린다."
바다 거품과 박테리아 군집이 나란히 병치되면서 아프로디테의 탄생이 자연히 떠오른다. 바다 거품처럼 보이는 박테리아 군집. 거세된 핏방울이 바다에 떨어지자, 거품이 일며 탄생한 아프로디테. 사람은 박테리아를 멸시하지만, 실은 인간은 그로부터 진화했다. 박테리아는 섬세한 미생물이란 다이얼로그와 바다 거품을 담는 화면이 교차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고통받는 일, 내겐 꿀도 벌도 아닌. 내게 오라, 나는 간절히 죽는다."
열정과 욕망이 스쳐 갈 뿐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과 더불어 박테리아로 구성된 우리는 서로를 욕망해도 존재는 그대로다. 오라, 나는 간절히 죽는다, 죽을 만큼 당신을 원한다. 사랑의 이중적인 면이 이것 아닐까.
"내가 잘 대해준 사람들이 내게 상처를 준다, 미친 것."
인간 남자를 사랑한 님프, 칼립소의 이야기가 잠시 등장한다. 칼립소는 인간을 사랑하게 되어 몇 년을 동굴에서 보냈다. 님프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로잡힘, 그것을 사랑으로 승화한 것의 예시이다. 그러나 칼립소의 통곡은 멸시를 받는다. 깊이 사랑했으나 결국 대상은 떠났고, 홀로 남아 멸시를 얻는 그 모습. 칼립소에게서 '너는 나를 불태워'가 가장 선명히 드러난다.
"하나의 형태로 태어나 다른 형태로 죽는다. 운명은 행복, 아름다운 노래를 하리라."
파베세의 번민과 함께 사포의 시구,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 죽음, 이별이 운명과 함께 엇갈려 읊힌다. 아프로디테를 향한 (곧 사랑 자체를 향한) 기도처럼 느껴졌다. 사랑은 욕망과 번민, 열망과 고통. 그것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하리라.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을 뿐 망각한 것이 아니다."
사과를 먹는 시퀀스가 반복된다. 높이 열린 사과를 따는 장면과 함께. 욕망과 사과.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잊은 게 아니라 그저 닿지 않는 곳에 뒀을지도 모른다. 고통을 자연히 피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면 곧 사랑하게 되리. 누가 운명을 따르나요, 미소 짓는 우리는 예외예요."
사랑에 빠져 자신을 버린 여자들. 혹은 강렬한 사랑을 피해 달아나 자신을 버린 님프들. 평온함을 누리는 인간들과 거리가 먼 존재들.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 그리고 현대의 <바다거품>을 현현하는 주인공들. 헬레네가 평온의 대명사로 등장하나 그들은 사후에도 행복할 그녀가 부럽지 않다고 말한다.
"이름 없이 태어나 번민 속에서 자신을 향해 미소 짓네."
어쩌면 바다 거품 같은 박테리아 군집으로부터 진화한 사람은 여성으로 바다 거품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누군가는 기억할 존귀한 여명". 누군가의 입에서 암송될 욕망 같은 시인 것이다.
사포의 새로운 시가 발견됐다는 메시지와 함께 마지막으로 "너는 나를 불태워"가 "너는 나를 애태워"로 변하며 영상은 작별은 고한다.
아름답게 불완전한 세계에서, 우리가 멸시하는 박테리아가 우리의 기원인 현대에서. 사포의 시뿐 아니라 나는 허수경 시인의 <우연한 감염>을 떠올리게 된다.
우연한 감염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몰랐을까 나의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이었네 사랑이나 폭력을 그렇게 불러볼 수도 있다면
폭력에서 혹은 사랑에서 어디에서 내가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고 있는 이 세계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고 고독이 없는 것은 아냐 사랑의 태아 폭력의 태아 태어나지 못한 태아들은 어쩌면 고독의 무시무시함을 안고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긴 산책을 하는지도 몰라
태어난 시간 59분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0시 사이, 미쳐버릴 것 같은 망설임으로 가득 찬 60초 속에는 태어나기 직전의 태아와 사라지기 직전의 태아가 서성거리네
태어나게 해, 태어나게 하지 마, 폭력이든 사랑이든 이건 조바심과 실망의 모래사막에 건설된 오아시스인데 나의 망설임은 당신을 향한 사랑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폭력인지
우연한 감염 끝에 존재가 발생하다가 갑자기 뚝 끊겨버린 적막의 1초
어디론가 가버린 태아들은 태어나지 않은 오후 5시에 흘러나올 검은 비 같은 뉴스를 들으며 구약을 읽을 거야 그 뒤에 흘러나올 빗물 같은 레게 음악을 들으며 바빌론 점성가들에게 문자를 보낼 거야
모든 우울한 점성의 별들을 태아 상태로 머물게 해요, 얼굴 없는 타락들로 가득 찬 계절이 오고 있어요, 라고
우리 존재의 우연성. 태어나 갖게 된 불완전성. 존재함으로 생긴 생산적 잠재력. 그리고 사랑이나 폭력을 우연한 감염으로 불러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애석하게도 우리는 우연히 뚝 끊겨버리지 않았다. 박테리아가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했듯이 우리는 존재하게 되었다. 파편은 완전한 우주가 될 수 있다. 결핍에 머무는 것. 사랑과 열망, 고통과 번민에 우리를 맡기고야 마는 것. 우리는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의 파편을 만든다.
파편성은 단순한 결핍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의 근원이다. <너는 나를 불태워>는 사포의 파편성과 인간의 파편성을 같이 두고, 언어와 상반되는 이미지로 가능성을 말한다. 사포의 시가 2,500년 동안 계속해서 해석을 불러일으켰듯 인간에게도 그런 가능성이 무한히 존재함을 말한다. 인간이 계속해서 사랑하는 한 말이다.
"너는 나를 애태워."
결핍이 우리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일까? 확실한 건 성장에는 결핍이 필연적이다. 우리는 사랑하고 커가는 동안 내내 불완전하게 애탈 것이다. 네가 나를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애태운다. 그리고 나는 나를 사랑으로 불태우게 된다. 이런 인간의 파편적인 불완전성은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한 내내 아름다우리라. 그리고 이름 없이 태어나 번민 속에서 스스로에게 미소 짓는 아프로디테처럼 불완전한 사랑을 하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미소를 보낼 것이다. 오래 암송될 존귀한 여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