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글리 시스터(2025)
외모에 대한 강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간다. 바디 포지티브라는 개념과 운동이 생겨도 여전하다. 이미 초등학교 이전부터 화장에 관심을 갖는 여아들, 여전히 성장 상향 곡선을 가파르게 그리는 다이어트 보조제 회사들. 글로벌한 소통이 생겨나면서 미디어가 보여주는 획일화된 미의 기준은 더 빠르게 퍼져간다.
이뿐 아니라 타인의 기대에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욱여넣는다. 휘황찬란하게 포장된 '사회적 성공'에 자신을 끼워 넣으려 우리는 노력을 넘어 학대한다. 외모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부, 명예, 학벌, 출세 등등 모든 것이 '성공의 기준'이 있다. 사회는 기준에 든 사람과 아닌 사람을 극명하게 가르기에, 우리는 기꺼이 기준에 들고 싶어 희생한다.
그런데 정말 이것이 현대인만의 병적 현상인가? 영화 <어글리 시스터>는 중세가 배경이지만, 이에 대한 추구는 현대와 다르지 않다. 외모의 아름다움이 곧 부와 명예를 영위하는 것과 직결되는 세상 속, 외면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내면에서 건져줄 수 있는가? 아니, 진정 아름답기만 한 내면이 있긴 하는가?
<어글리 시스터>는 고전 동화 신데렐라의 잔혹 버전 각색이다. 주인공은 신데렐라 아닌 의붓언니. 이뿐 아니라 동화와 다른 점은 또 있다.
이 세계관에서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인물이 없다. 속물이다 못해 밝히는 엄마, 돈만 보고 재혼하곤 바로 죽은 새아빠, 마부와 이미 사랑에 빠져 정사를 나누는 신데렐라, 저속한 농담을 일삼는 속물 왕자까지. 나열하지 않은 주변 인물들도 다 저속하기는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서 도덕적 우월함, 무결함을 가진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답기만 한 내면이란 동화가 가진 최고의 판타지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8세기 유럽, '엘비라'에겐 꿈이 있다. 왕자님과 결혼하는 꿈. 그러나 그곳에 도달하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으니, 그중 가장 큰 난관은 바로...
그녀의 외모이다. 교정기를 낀 것으로 등장해, 영화 내내 고통스럽기 짝이 없어 보이는 성형과 다이어트를 하기에 이른다. 이 장면뿐 아니라 주변인들이 엘비라에게 하는 말조차 호러다.
그저 평범한 외모인 엘비라에게, 엄마부터 시작해 주변인들은 거침없이 말한다. '뚱뚱하다', '몸매가 공 같다', '코가 못났다', '이렇게 생긴 널 어떡하니' 등등. 외모에 대한 언어폭력은 끝이 없다.
하필이면 엄마가 재혼한 남자의 딸, '아그네스'는 아름다운 외모로 자자하다. 이런 대비되는 상황에 왕자의 신붓감을 찾기 위한 무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아름다운 아그네스와 그렇지 못한 엘비라. 둘의 대비는 점점 고조된다.
마부와의 정사가 들통난 아그네스는 신데렐라로 불리며 하녀처럼 살게 된다. 이런 아그네스 또한 계모의 지난한 차별과 학대에서 벗어나고자 왕자와 결혼하려 한다. 그러나 엘비라가 그것을 두고 볼 수 있겠는가. 그녀는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엄마의 도움으로 자신을 학대한다.
엘비라가 아름다워지려 하는 모든 시술들은 하나같이 끔찍하다.
코를 정으로 찍어서 하는 콧대 교정술, 촌충알을 먹어 다이어트하기, 속눈썹을 눈가에 꿰매기. 극한의 고통 속에서 엘비라는 왕자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며 견딘다.
그런 고통으로 날씬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한 엘비라의 모습은 예쁘기보다 서글프다. 결국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들은 외모에 대한 평가와 성희롱일 뿐이다. 이런 모든 잔혹한 것들에도 동화의 줄거리는 진행된다. 신데렐라의 결말은 왕자와 이어지는 것이다.
아그네스가 무도회에 흘리고 간 구두, 그 구두가 맞는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왕자의 선언. 엘비라는 기어코 끔찍한 선택을 한다. 자신의 발이 그 구두에 맞게끔 칼을 든다.
그러나 더 끔찍한 건 엘비라로 부와 명예를 얻으려는 엄마였다. 자르다가 기절한 엘비라를 보며 '반대쪽 발을 하면 어떡하니'하는 모습은 경악 자체였다. 그녀는 정육점 고기 자르듯, 딸의 발가락을 자른다.
더없이 핏빛으로 참혹한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엘비라의 동생 '알마'다. 왕자는 아그네스와 떠나고, 엄마는 여전히 남자와 침실에 있고, 언니는 이제 몸이 성치 않다.
알마는 언니의 몸에서 촌충을 꺼낸 후, 언니와 자신을 그 환경에서 꺼내어 도망친다. 이 결말만이 어쩌면 유일한 구원일 것이다.
중세 배경이나 현재의 모습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미에 대한 강박적 추구. 아름다움을 향한 피와 비명에 인상을 찡그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덧없는지 오은 시인의 <스크랩북>을 읽으며 생각한다.
스크랩북
오전에는 패션지에 실린 너를 오린다
너는 앉아 있지만 나는 모가지에서 너를 싹둑 자른다
스모키 화장을 한 네 얼굴이 마음에 든다
얼굴 없는 네가 의자에 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오후에는 신문에 나온 너를 오린다
너는 서 있지만 나는 눈 딱 감고 네 허리를 쳐내버린다
너의 상체는 내가 탐할 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네 반쪽이 방금 3면에서 사라졌다
네 가슴을 구하기 위해 나는 성형외과에 간다
성형외과에는 빵빵한 가슴들이 많다
나는 포스터를 훑고 맘에 든 가슴 한 쌍을 오린다
조만간 너는 더 완벽하게 태어날 것이다
집에 와서 너의 부위들을 잇대기 시작한다
조각난 하루도 이어 붙인다
패션지에 실린 너의 얼굴과 신문에 나온 네 하체 사이에 너의 새 가슴을 이식한다
너는 전보다 더 자신만만해졌다
수술을 마친 너를 분쇄기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른다
너의 육체가 국수 면발처럼 뽑혀 나온다
나는 너를 파괴하고 창조하고 다시 파괴할 권리가 있다
스모키 화장을 한 네 눈에 방금 잿빛 눈물이 맺혔다
조각난 너를 가지고 폭죽을 만들겠다
너는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질 것이다
두 팔을 활짝 벌려 너를 안아주겠다
열리지 않는 책이 되어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겠다
신인가수가 깜짝 데뷔해 내 취향을 바꾸어놓을 내일모레까지는
오려진 부분으로 콜라주로 구성된 미녀를 떠올리면 기괴하다. 애써 붙인 아름다움의 유통기한은 하루다. 그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는 다음 아름다움 전까지만 유효하다. 세상이 원하는 미는 있으나 없다. 텅 비어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다.
각 개인은 잡지에서 오려내어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님에도, 잡지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을 필사적으로 가지려 모두 스스로를 오린다. 마찬가지로 엘비라는 그저 엘비라이다. 급사한 아버지를 추모하는 아그네스를 위로하는 모습도, 아그네스에 대한 질투도, 모두 그녀다. 엘비라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고, 순종적이면서도 파괴적이다.
세상은 흑백논리로 나눌 수 없듯, 사람의 내면도 흑백으로 가를 수 없다. 극 중에는 엘비라를 보며 순종적이고 착하다고, "외모를 아름다운 내면에 맞게 바꾸는 중"이라는 말이 나온다. 글쎄. 외면이 마음을 반영한다면 추악할 때의 마음은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 걸까.
<어글리 시스터>는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를 의붓언니의 시선에서 뒤튼다. 이는 단순히 외모 콤플렉스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타인의 욕망과 사회적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는 인간의 비극적 본능은 엘비라의 육체를 통해 고통스럽게 재현된다.
그렇다면 더 이상 오려진 부분으로 구성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영화에서 답은 단순하다. 아름답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욕망과 경쟁에서 나가는 것이다. 엘비라와 알마의 도망으로 구현된 결말은 도망보단 도피이고, 도피보다는 새로운 출발이다.
영화는 바디호러로 미에 대한 잔인함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묻는다. '이래도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욱여넣을 거야? 조각조각 잘린 모습으로 너를 구성하고 싶어?'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우리가 타인의 기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환상에서 벗어나 타인의 기대에 자신을 욱여넣지 않을 때, 나라는 틀을 내면에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작은 탈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한 건 우리가 우리를 조각내고 오려내어 텅 빈 모습이 되기 전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것. 영화가 끝난 후,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미소 한 번 더 지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