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음에 관하여(2019)
영원히 지속되는 영화가 있다. 정확히는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데, 서사가 중구난방인 영화가 있다. 그건 바로 '삶'이다. 보통의 영화는 일생의 한 부분을 떼어 일관된 서사를 잣는다. 하지만 실제로 삶은 시종일관 하거나 단일하게 이어지는 서사의 흐름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특히 어떤 순간의 한가운데 있을 때 더욱 그렇다.
<끝없음에 관하여>라는 영화는 가장 그런 인생의 특징과 닮았다. 삶의 파편들을 영화로 담는다면 이런 모습일까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서사가 아니라 '삶 단면의 집합' 그 자체이다. 인생은 끝이 없다. 이 영화는 그 '끝없음'에 관한 것이다.
이 영화에는 전통적 서사 구조가 없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독립된 여러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각기 다른 순간들을 포착한 짧은 스케치처럼 이어진다.
내레이션의 침착한 목소리로 시작되는 각 장면들. 보다 보면 시각적 연작시가 이어지는 느낌을 준다. 하나의 에피소드에 하나의 시퀀스만 있고, 관객은 그것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다. 영상 회화를 감상하는 듯하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부터 역사적 비극까지, 인간 경험의 스펙트럼을 넓게 아우른다. 치과에서 마취를 받고 무력해진 남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의 모습, 술집에서 절망에 빠진 목사, 실연으로 버스에서 소리 내 우는 사람, 기차역에서 마지막 작별을 나누는 연인들. 각 장면은 독립적이면서도 삶의 순간이라는 점에서 연작성이 있다. 그중에서 껴안은 연인들이 파괴된 도시 위를 부유하는 장면만은 초현실적이다.
삶이란 이렇게 계속되는 것이며, 우리는 존재의 파편을 영화나 책 등의 작품으로 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인찬 시인의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라는 시 또한 그렇게 뚜렷한 인과도 근거도 없이 이어지는 연작적인 생애를 담고 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옆집 강나무에는 아기 머리통만한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누가 키웠을까 사람도 살지 않는데 산책하다 무심코 한 말에 저걸 누가 키워 알아서 자라는 거지 그가 말했습니다
담장 위로 나란히 앉은 새들은 정답게 울고 겨울을 맞아 잔뜩 털이 올랐네요
과연 그렇군요 다 알아서 자라는 것이군요
언덕길 경사를 따라 햇빛 떨어지는 오래된 동네
새들이 햇살 아래 자주 웃고 떠든다는 생각
살기 좋은 동네 같아, 그것은 우리가 이곳에 떠밀려오던 날, 이삿짐을 풀며 그가 했던 말
그런 말을 듣고 보면
왠지 정말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요
인적 없는 집에도 감은 열리고
삶도 사랑도 그렇게 근거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내일은 오고
때때로 눈도 비도 내리겠지요
우리는 이 동네로 떠밀려왔고, 어느새 짐을 풀고 있었을 뿐이지만
깨어도 꿈결 속아도 꿈결
꿈이 아니라는 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가 늙었을 때,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 동네에서 곱게 늙은 두 노인이 되었을 때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누구에게 해 끼치는 일도 없이 계속되어온 그저 선량한 우리 삶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이 깊어가는 가을
밤마다 옆집에서는 잘 익은 감들이 하나둘 떨어졌고
그때마다 사람 머리통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사는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그렇게 이어진다. 이 시의 제목은 성구인데 예수가 제자들에게 의식주를 우선순위로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건넨 말이다. 의식주가 사람의 삶의 기본이라 할지라도 전부는 아니니 말이다.
'머리통 깨지는 소리'가 언제 들려올지 모르는 것처럼 <끝없음에 관하여>의 장면 속 사람들도 갑작스러운 일상의 이벤트를 맞이한다. 하지만 '인적 없는 집에도 감은 열리고/삶도 사랑도 그렇게 근거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라는 시구처럼 그렇게도 삶은 계속된다. 쭉.
초현실적인 장면 속 폐허 위를 날아가는 연인들처럼,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우리의 인생을 우리는 흘러가며 관망할지도 모른다. 관망과 동시에 고통이나 슬픔, 기쁨이나 가능성을 느끼면서 말이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인생의 인과 없는 연속성과 무한함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닐까. 이 영화에 대한 답은 관객마다 다를 것이다. 삶에 대한 답이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그것이 바로 예술이 가진 본질적 기능 중 하나이리라고 생각해 본다. 우리 삶의 연작이 어떻게 이어질지 몹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