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소일기(2023)
아이가 아이답게 자라지 못하는 세상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어린이때부터 노동과 전쟁, 조혼에 불려 가던 아이들은 역사에 아주 짤막하게 기록만 되어 있다. 교육이 중시되면서부터는 달라졌을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성적의 우수성이 성공 가능성과 너무나 밀착한 나머지, 엄격하게 교육을 시키는 부모와 부모의 말에 꼼짝 못 하며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 교육이 중요해지면서부터 전반적으로 배울 기회는 확대되었지만, 아이가 아이답게 실수해도 괜찮다는 인식은 교육의 중요성만큼 확대되지 못한 듯 보인다.
인구가 과밀한 주요 도시의 교육열은 어른들에게도 치열할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잔혹하기까지 하다. <연소 일기>는 홍콩 사회의 그런 이면을 담아낸 작품이다. 그뿐 아니라 '생각'하게 한다. 아이가 충분히 실수할 수 없는 세상의 성공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연소 일기>의 오프닝 시퀀스는 다소 충격적이다. 누가 봐도 유복한 한 가정. 성공한 변호사인 아버지와 미인인 어머니 그리고 두 아들. 그러나 성적 하위권으로 유급하게 된 한 아이는 가족들이 해외여행 가는 것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고, 항상 혼이 난다. 그리고 그 아이는, 옥상 끝에서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현재. 고등학교에서 타성에 젖어 무심한 교사, '정 선생'. 그는 한 교실의 쓰레기통에서 익명의 유서를 발견한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라는 절망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버려진 종이 위의 유서. 대입 시험을 앞둔 상황에서 이 사건을 덮으려는 교감과 달리, 그는 편지의 주인을 찾기 위해 학생들의 글씨를 일일이 대조해 본다.
그 과정에서 정 선생은 편지 속 한 문장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되고,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든다. 그 일기로 그는 현재와 과거를 곂쳐 보게 되고, 관객도 그를 따라가게 된다.
"일기야, 안녕? 오늘부터 매일 일기를 쓰기로 했어."
일기 안에서 10세 소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열심히 쓰다 보면 바라던 어른이 될 거라는 믿음으로 매일 일기를 써내려가던 한 아이, 요우제. 그러나 부모의 과도한 기대는 영재인 동생 요우쥔에게만 관대했고, 요우제에겐 모진 말과 혹독한 대우가 이어진다.
요우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오는 것은 주변인들의 무시와 가시 돋친 말뿐. 오프닝에 나온 장면으로 향하며 고작 10살이던 요우제의 일생이 끝난다.
정 선생은 요우제의 동생, 요우쥔이었다. 그는 죽은 형의 일기를 읽으며 묻어뒀던 자신의 아픈 과거와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다. 형의 죽음 후, 와해된 가족과 영재에서 엇나간 그의 삶. 그리고 현재 그가 잡을 수 없던 결혼 생활. 그는 그 버려진 유서를 쓴 학생을 찾기 위해 분투한다.
그 분투의 끝에 정 선생, 요우쥔은 두 사람을 살리는 듯 보인다. 그 학생과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 학생을 구하며 아주 오래 묻어둔 자신을 마주하고 학생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정 선생. 그는 자신이 진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영화는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분명 그사이엔 한 아이가 성인이 될 만큼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이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세상은 여전하다. 이은규 시인의 <천칭자리 스티커북>같은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천칭자리 스티커북
봄이 되면 겨울철 별자리들은 서쪽 방향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절기 내내 하늘에 별들이 보이지 않아요 그럼에도 괜찮습니다 짙푸른 하늘이 그려진 스티커북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지요 눈이 아프게 흩뿌려진 별들, 별자리들의 실루엣이 점선으로 그려져 있지요 모양에 맞는 스티커를 찾아 붙이면 되는 놀이, 그림판과 스티커 뒷면이 매끄러워 실수를 해도 몇 번이든 다시 떼었다 붙일 수 있어요 놀이로 배우는 너그러움입니다 배움은 왜 우리를 앞지르거나 뒤쫓아 오는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저를 찾아와 이 놀이를 선물해주세요 잘못 붙여도 다시 떼었다 붙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놀이, 일찍 배움을 얻었다면 실수를 두려워하는 실수를 하지 않았겠지요 잘못 쓴 글씨 하나 때문에 다 쓴 편지를 찢고 싶었던 시간들이 길었어요 그때의 나는 비뚤어진 선 하나가 오래 아팠습니다 마음을 다친 아이가 비뚤어질 거야, 라고 중얼거리고 있군요 저에게 천칭자리 스티커북을 선물해주세요 선악을 재어 운명을 결정 한다는 천칭자리, 모든 것을 재기 위해 아무것도 재지 않기 위해 오고 있을 어제를 환영하기 위해
정 선생이 학생들에게 무심하다가 진정으로 학생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것처럼 우리에게 '배움은 우리를 앞지르거나 뒤쫓아온다'. 그는 어쩌면 그의 형에게 '잘못 붙여도 다시 떼었다 붙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놀이'인 천칭자리 스티커북을 선물해 주고 싶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는 이제 만나게 되는 학생들에게 '실수를 두려워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줄지도 모른다.
육체의 상처보다 더 치유하기 어려운 것은 마음의 상처이다. 특히 어릴 적 남은 상처는 생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아이가 실수해도 괜찮다고 다시 도전하면 된다고 해주는 사회는 된다면 예방하거나 치유할 기회가 더 많아지지 않을까.
<연소 일기>는 영화로서는 어쩌면 조금 뻔한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가 사회에 말하고자 하는 바는 뻔해도 꼭 말해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현실은 여전히 아이들의 실수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가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 어린 시절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어떤 어른,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답은 분명하다. 어린 시절, 내가 배운 너그러움 혹은 너그럽지 않음을 포용하고, 다음 세대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는 것. 치열한 사회에서 쉽지 않겠지만, 여린 존재의 실수를 용인하고 기회를 주는 그런 분위기가 이루어진다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