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고라 할 수 없는 눈먼 자들의 로드무비

그저 사고였을 뿐(2025)

by 명태

"과거는 죽지 않았다. 심지어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Requiem for a Nun』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이 말은 유명한 경구로 자주 인용된다. 소설보다 현실에서의 과거는 더욱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과거는 영구한 상처로 남는다. 과연 그런 상처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나을 수 있을까?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로 관객에게 묻는다. 과거가 정말 '그저' 과거로 지나갈 수 있겠느냐고. 정의와 복수가 그리 멀지 않듯 과거와 미래도 결코 멀지 않다고. '그저 사고'로 치부하고서는 미래로는 갈 수 없다고.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어, 그저 사고였을 뿐. 이것도 신의 뜻이겠지."


늦은 밤, 한 남자가 만삭의 아내와 어린 딸을 태우고 운전하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차 앞으로 뛰어든 개를 치어 죽이고 만다. 아내는 이조차 신의 뜻이라며 그저 사고였다고 가볍게 넘긴다. 하지만 뒷좌석의 딸은 이게 무슨 신의 뜻이냐며 아빠가 개를 죽였다 침울해한다. 그것도 잠시, 사고로 차에 이상이 생겨 주변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남자가 도착한 어떤 정비소. 그곳의 정비공 '바히드'는 남자의 의족 소리를 듣고 과거 자신을 고문했던 정보관임을 확신하고 그를 납치한다.

그 남자를 생매장하려 했으나 확신은 곧 의심으로 바뀌고 만다. 바히드는 이 남자의 정체를 확실히 하기 위해, 과거 함께 고문당했던 동료 피해자들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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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 촬영을 하고 있던 '시바', 신부가 될 '골라', 백수건달처럼 살고있는 '하미드'까지. 그러나 고문당할 때 안대로 눈이 가려져 있었기에, 누구도 그 남자의 신원을 확신해 주지 못한다. 고문관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 채 모인 이들은 남자를 살려야 할지, 복수를 해야 할지 딜레마에 빠져 갈등하고 반목한다.


"너네들도 이놈들처럼 신의 뜻 뒤에 숨을 거야? 아니면 자신의 실패에 책임을 질 거야?"


고문관이냐 아니냐, 살려두냐 마냐로 한참을 갈등하고 있을 때, 하나의 사건이 더 발생한다. 만삭인 남자의 아내가 출산이 임박한 것. 결국 그들은 남자의 아내와 아이를 병원에 데려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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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극에 등장하는 결혼과 출산. 이런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상황은 역설적이면서도 과거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됨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이들이 움직이는 내내, 지속적으로 팁이든 병원비든 돈을 잃어간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가진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댓가를 치르며 살아가는 것의 비유적 장치같았다.



결국 골라와 하미드를 보내고 남은 바히드와 시바. 그 남자의 자백을 받기 위해 떠난다.


정신을 차린 남자는 자신이 고문관이 아니라고 하다가도 자신이 맞다고 하며 자신은 '그저 명령과 신의 뜻을 따른 것'으로 명예롭다고 응수한다. 그러다가 아내의 출산 소식을 듣고는 자식을 보고 싶다고도 울부짖는 모습을 보인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전복되고,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모호해진 상황. 바히드와 시바는 남자의 묶인 손만 풀어주고 떠난다.



어느 날, 바히드가 동생의 결혼을 준비하며 예단을 옮길 때 뒤에서 '의족 소리'가 들린다. 점점 가까워지는 의족 소리. 바히드는 굳어서 돌아보지 못한다. 과연 그 소리는 정말 그 남자였을까, 아니면 과거 잔재의 환청일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은 최승자 시인의 <時間입니다>에서도 등장한다.


時間입니다

과거를 현재로 살고 있는 사람들
파먹을 정신이 없어서
과거를 오늘의 뷔페식으로
섞어 먹는 사람들
언제쯤 그 정신이라도
끝날 날이 없을까
그 정신 뷔페식을
같이 먹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사람들
그냥 꿈결이었다고
건너 뛸 수는 없을까
해 지고 달 떠도
정신은 아귀아귀여서
과거의 바윗덩어리라도
삶아 뜯어 먹어야 한다는 사람들
과거 때문에 현재도 미래도
다 놓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찰칵찰칵 시간이 잘 지나갑니다

혹은 엘리엇的(적)으로 時間입니다 時間입니다


'과거를 현재로 살고 있는 사람들', '과거를 오늘의 뷔페식으로 섞어 먹는 사람들'처럼, <그저 사고였을 뿐> 속 인물들은 과거를 소화하지 못한 채 되씹는다. 과거를 생매장할 수도 없고, 없던 일로 잊고서 미래로도 갈 수 없다. 영화는 쉽게 답을 내리지 않는다. 현실의 삶이 그렇듯, '그저' 단순한 답은 없듯이 말이다.


바히드는 끝내 과거의 잔재를 삼키지 못한 사람이다. 그에게 의족 소리는 단순한 환청이 아니라, 과거가 씹히지 못한 채 목구멍에 걸린 소리다.


그러나 시와는 달리 '과거 때문에 현재도 미래도 다 놓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가진 이들은 미래를 다른 사람보다 더 힘들게 살아간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며 폭력을 더 큰 뜻으로 포장하던 시대는 정말 끝났는가?


이란의 현실만이 아니다. 모든 폭력의 역사 앞에서 우리는 같은 질문을 마주한다. 시간이 모든 걸 치유해 주지 않는다. '찰칵찰칵 시간이 잘'만 지나가도 과거는 지나가지 않는다. 과거는 죽지 않았다.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역사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걸어오는 중이다. 과거를 외면하지 않고, 폭력의 형상을 계속해서 가늠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 말하지 않기 위한, 우리의 최소한의 윤리이자, 살아 있는 과거와 함께 사는 방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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