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매달려야만 닿을 수 있는 곳

키메라(2023)

by 명태

누구나 한 번쯤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생이 자신의 자리를 찾는 답사라고 느낀 적이. "My place in the world." 서구권에서 많이 나오는 관용어다. '자아 찾기'나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과연 세상에서 자신의 일, 소명, 위치를 찾는 것은 본능적인 일일까?


그럼, 그 자리가 혹시 무덤이라면 어떨까?

사람은 모두 죽지만, 그럼에도 죽음과 밀접하여 그것에 강렬하게 끌리는 부류가 있다. 영감이 있는 이들이 그렇다고들 한다. 물적인 공간과 영적인 공간의 경계에 있기에, 그들은 살아있지만 죽음과 가까운 곳에 자석처럼 이끌린다. 그런 이들 중 유독 죽음과 예술의 교차점에 끌려서 다닌다면? 아마 고고학이 그런 사람들에게 적합한 분야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21세기를 맞이하며 고고학은 쇠퇴하는 분야로 여겨졌지만, 아직 어딘가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은 분명 남아있다. 그래서 끝없이 새로운 유물이 나올 때마다 대서특필되는 것이다. 모든 걸 다 찾았다고 하나 아직도 묻혀있는 것. 그것을 찾기 위한 끝없는 답사. 그것이 영화 <키메라>에서 말하고자 하는 각 사람이 가진 고고학, '키메라'이다.



감옥에서 출소한 '아르투'. 아르투는 영국에서 고고학을 공부했으나, 이탈리아에서 도굴꾼으로 살다 감옥에 잡혀 들어갔다. 출소한 그는 기차에서 잠을 자며 꿈을 꾼다. 사랑했으나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그녀, '베니아미나'가 나오는 꿈. 아서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과의 추억이 서린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로 돌아온다.


아르투는 패거리들과 함께 에트루리아 문명의 고분을 도굴하며 살아간다. 그에게는 땅속에 묻힌 유물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특별한 능력이 다. 무덤이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들고 있다가 찾아오는 일종의 트랜스 상태. 아르투가 접신한 듯 쓰러지면 동료들은 '키메라 상태'라며 무덤을 파기 시작한다.



이 키메라 상태일 때, 화면이 180도 돌아간다. 아르투는 지상을 디딘 채, 거꾸로 매달린다. 그가 키메라 상태로 진입한 그곳에는 늘 유물이 있다.



아르투는 자연스레 근처의 베니아미나의 어머니가 사는 집에 들린다. 베니아미나가 아직도 살아있는 양 말하는 노모를 방문하며 그는 위안을 느끼는 듯 보인다. 그러다 그 집에 노래를 배우러 와서 시종처럼 일하지만, 노래에는 재능이 없는 '이탈리아'라는 여성을 만난다. 아르투는 이탈리아와 가까워지며 무덤에서 가져온 종을 선물하지만, 이탈리아는 불쾌해하며 반납한다.



이탈리아는 죽음과 예술이 현존하는 그 집과 반대되는 이미지다. 생기 넘치고 아이를 키우며 예술에 딱히 재능이 없다. 베니아미나와 이탈리아. 죽음과 삶. 고고학과 생동. 이렇듯 영화는 이탈리아의 존재로 생명과 죽음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살아있지만 죽음에 강렬하게 끌리는 아르투가 있다.



영화 내내 아르투는 꿈을 꾼다. 옷 끝의 붉은 실오라기가 풀려 어딘가에 걸린 베니아미나가 그보다 앞서 나가는 꿈을. 이탈리아와 연인관계가 되어서도 아르투의 도굴과 꿈은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아르투 일행은 도굴 중 가치가 있는 유물, 여신상을 발견한다. 여신상은 오랜 세월 무덤 안에서 인간의 시선 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여신상을 본 아르투는 예술 앞에서 숨이 멎은 듯해 보인다. 동료들이 돈을 위해 조각상 운반을 위해 조각의 머리를 분철하려 하고 그는 격렬히 화를 낸다. 여기서 아르투가 단순한 도굴꾼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함이 느낄 수 있다.


결국 옮기기 위해 여신상을 조각내고 아르투는 절규한다. 그리고 경매업자에게 이 여신상을 팔기 위해 간 자리. 경매업자들과 동료들이 금액을 두고 다투는 사이, 아르투는 "이건 사람들이 보라고 만든 게 아니야"라며 여신 두상을 물속에 던져버린다.



거래를 망쳐버린 일로 패거리에게 배척당한 아르투. 이탈리아를 찾아가 함께 지내는 듯 보이지만, 결국 다시 어딘가로 떠난다. 그는 땅 위에서 새로운 사랑과 기회가 생겨도 끊임없이 땅 밑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찾으려 하는 듯 보인다.



결국 다른 패거리와 도굴 작업을 하게 되고, 그는 흙이 쏟아져 홀로 땅속에 갇힌다. 아르투는 땅 위로 나가려 하지 않고 그대로 전진한다. 나아가다 보니 마침내 그는 꿈속의 붉은 실을 마주하고 잡는다. 실을 따라가니 베니아미나가 웃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다. 만나 가장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이며 영화는 끝난다.



아르투가 일생에 걸쳐 답사하던 것은 죽음과 예술, 그리고 사랑이 있는 그 자리가 아닐까. 흙 속에 갇힌 아르투는 자신의 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사람이 보라고 만든 예술이 아닌 것. 오로지 죽은 자를 위한 아름다움. 그리고 죽음으로 건너간 사랑하는 여인.


그는 그것들을 갈망하며 찾아다니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잡기 위해 땅을 위에 두고 마는 '키메라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의 키메라는 이동욱 시인의 <답사>와도 같다.


답사

이곳은 알던 곳이다
전에 왔던 곳이다

전생이나 어제 혹은
먼 미래라고 하자

나는 이곳에서 슬펐고,
누군가를 떠나게 했으며,
잊어버린 뒤에
완전히 잃어버렸다

내 손은 무언가 잡고 있었다
곤충의 날개는 엄마처럼 울었다
마을 초입에 느티나무 다음,
평상 아래 신발을 지나
담장을 따라가며 누군가 콧노래를 불렀다

당신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요
왜, 다른 곳은 알지 못하는데,
날지 못하는 곤충이 바닥을 기어간다
엎드리면 금세 잠이 들었다

죽었어?
이제 그만 일어나
가자

곧 익숙한 무리가 이곳으로 올 것이다
나는 비로소 슬픔의 자격을 얻는다


'이곳은 알던 곳이다/전에 왔던 곳이다'는 말처럼 아르투는 그곳을 아는 것처럼 무덤을 발견한다. '전생이나 어제 혹은/먼 미래'인 그것. 아르투는 일생 동안 고고학에서 도굴이라는 행위로 답사를 다닌 것이 아닐까.


'잊어버린 뒤에/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이 영화의 모티브이기도 한 오르페우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저승으로 내려가는 대신 베니아미나를 완전히 잃었다. 대신 그는 갖게 된 것이다. '슬픔의 자격'과도 같은 것을. 모두들 '당신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요'라고 하지만 아르투는 떠날 수가 없다. '왜, 다른 곳은 알지 못하는데'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키메라란 영원히 쥘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이란 말처럼. 그는 그 열망을 찾아 답사를 멈추지 못했고, 다른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기어코 땅을 위로 둔 채 거꾸로 매달려 찾았다. 이제 그가 있을 곳은 지상이 아닌 지하가 됐다. 하지만 이는 끝이 아니다.


'죽었어?/이제 그만 일어나/가자'는 말처럼, 베니아미나가 아르투를 부르고 있다. 이제 그 답사는 끝났다고.

감독이 키메라 상태일 때 카메라를 180도 돌린 것은 이런 저승으로의 진입을 표현한 것이 아닐지 추측해 본다. My Place in the world. 어쩌면 아르투에겐 그곳이 World가 아니라 Underworld였을 수도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천시적(天示的)'이라는 말을 자연스레 쓰게 된다. 아르투가 추구하며 붙잡으려 노력하던 키메라는 불완과 변동의 삶이 아닌 완성되고 보존되는 예술의 곁이었다. 그는 그것에 천시적으로 끌렸다.


세상에 내가 있을 자리에 천시적으로 끌리게 되어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 길로 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한국말에도 팔자대로 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일생은 나의 자리를 찾아가는 답사가 아닐까. 누군가는 일찍 찾기도 하고 늦게 찾기도 하며 때로는 찾았다가 다시 다른 다리로 옮겨가려 하기도 한다.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서사이자 키메라를 찾는 과정이며 종국에는 나의 고고학이 되는 것이리라.


누군가는 분명하지만 닿기 어려운 키메라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반대로 모호하지만 금세 닿을 법한 키메라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키메라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나는 궁금하다, 그 키메라에 닿기 위해 우리는 거꾸로 매달릴 수 있는가.


확실한 건, 우리는 그 키메라에 닿기 위해 천시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갈망의 모습과 자리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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