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가자! 지구 최후의 날이야

피크닉(1996)

by 명태

지구의 종말과 자기 자신이 되는 법. 그것을 소풍으로 말한다면 이상할까? 우리는 흔히들 어려운 이별을 이해할 수 없는 아이에게 이야기할 때, 이별의 대상이 여행을 떠났다고 에둘러 말한다. 먼 여행, 잠깐 소풍, 혹은 미국에 갔으니 100번 자면 온다는 둥.


그렇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종말과 내가 되는 일 또한 소풍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와이 슌지의 <피크닉>은 정신병원에서 세 명의 환자들로, 언뜻 보면 매치할 수 없는 두 가지의 말을 잇는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법과 종말을 받아들이는 법 중 어떤 게 더 어려울지 그들에게 묻는다면 분명 전자가 어렵다고 할 것이다. 아니, 답하지 못할 것이다. 어딘가에 내가 실종됐으니까.



어두운 표정으로 뒷좌석에 앉은 부부, 그리고 앞에서 까만색의 펑키한 옷을 입은 채 끝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들의 딸, '코코'가 타고 있는 차. 누군가 길에 장미를 길게 깔고 있고 그것을 그 차는 밟고 지나간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정신병원이다.


도착하자마자 코코는 간호인들에게 붙잡혀 입원실로 들어가게 된다. 하얀 면직물의 병원복으로 환복해야 하는 상황. 코코의 짐에서 까만 깃털의 퍼가 나오고 간호사는 그것을 억지로 뺏으려다가 실패한다.



까만 깃털의 옷을 걸친 코코는 이윽고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토루'와 책을 읽으며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츠무지'를 만난다. 하지만 츠무지는 자신이 죽인 선생의 기이한 환각을 보는 증세가 있다. 밤, 코코는 그림 치료의 일환으로 나누어준 검은 물감으로 자신의 옷을 온통 새카맣게 칠하고, 까마귀를 잡아 깃털로 자신을 장식한다.


코코는 병원 담장에 올라 몰래 밖을 구경하는 사토루와 츠무지를 발견한다.

"뭘 보고 있어? 거기엔 뭐가 있는데?"

"지구."


담장을 따라 병원 밖으로 나간 이들은 교회 담장 위에 올라 아이들의 합창을 들으며 신부가 건네주는 성경책을 받는다. 그 후 성경을 읽게 된 츠무지는 구원과 지구 최후의 날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나는 지구 최후의 날이 언제인지 아는데."

"언제인데?"

"내가 죽는 날."

지구 종말의 날이 언제인지 왈가왈부하다, 책에 적힌 어떤 날짜를 종말의 날로 믿게 된다. 그리고 지구의 마지막을 바라보기 위한 곳을 찾아 담벼락 위를 걸어 피크닉을 떠난다.



현실과 환상은 담벼락 위라는 경계 공간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각각 담벼락을 걸으며 각자의 상처와 마주하던 이들은 각자의 끝에 다다른다. 잃은 '나'를 찾지도, 지구 최후의 날을 목격하지도 못했지만 피크닉은 그렇게 마쳐진다.



각자의 종말을 맞이한 이들은 인생 자체를 소풍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주어진 인생을 추억하게 된다면 아마도 배영옥 시인의 시 <나를 위한 드라마> 같은 독백을 할지도 모른다.


나를 위한 드라마

나는 한때 사람을 살았던 적이 있다

살아서 고통스럽던 기억은
씁쓸하고도
달콤한 드라마 같다

어제는 단맛만 골라 삼키고
오늘은 쓴맛만 삼켰다

아파서
면죄부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열린 결말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다음 생만큼은 시대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리라

전생에서 죽인 사람을
현생에서 다시 죽였다

화창한 대낮에
기억의 사막에
죽은 시체를 버려두었다

여행가방에 까마귀 날개를 넣어두고
나는 한때 사람을 떠났다


'한때 사람을 살았던 적' 있던 이들은 결국 '한때 사람을 떠났다'. 그렇게 한 발짝 떨어져 본다면 받아들이기 버거웠던 '살아서 고통스럽던 기억'은 그저 시의 제목처럼 드라마 같았을지도 모른다. '아파서 면죄부를 받은' 생은 <피크닉>과 같이 열린 결말이다. 다음 생은 다음 생에 다짐하기로 하고. '여행 가방에 까마귀 날개를 넣어두고' 떠나는 모습은 마지막 코코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때 사람을 살았던 적 있으나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들. 지구의 종말이 사회가 인정하는 자아보다 받아들이기 쉬운 경계의 이들, 그리고 이들이 걷는 담벼락. 경계에 선 자들이 새로운 시각의 루트를 발견한 것이 아닐까? 그들에게 있어 종말은 파멸이 아니라 재생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다.



피크닉은 어찌 보면 비극으로 끝나지만, 피크닉 자체는 성공이다. 자신들이 배제된 사회에 대한 질문이자, 어디에 두고 온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됐기 때문이다. 고로 이들은 정상성을 잃고 갇히는 배제와 격리의 메커니즘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한때 사람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시구처럼.


사회가 정상성을 정의하고 규제하는 것이 마냥 옳은 것일까. 누구에게나 비정상성, '내'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소풍 간다고 하는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우리에게도 가끔 그런 피크닉이 필요하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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