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 넘버 3(2025)
바람을 잡으려는 시도를 흔히 헛된 수고라 한다. 하지만 상실을 치유하려는 시도가 바람을 잡는 것과 비슷하다면 어떨까? 바람은 결코 잡히지 않지만, 그 시도만으로도 치유가 된다면? 과연 결과 말고 과정까지 헛되다 할 수 있을까?
<미러 넘버 3>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원소 3부작 중 'Air'로 자신이 속한 작은 세계를 고쳐보려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공기와 바람의 원소를 담은 영화답게 영화에선 내내 바람이 분다. 바람 부는 곳, 상처가 되고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 바람을 맞는다.
다리 아래, 강물이 바람에 일렁이는 것을 내려다보는 '라우라'. 그녀는 강 아래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망연히 본다. 아마도 '죽음' 자체의 징조를 응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남자 친구의 일정에 동행한다.
자기 삶에서 어딘가 동떨어진 듯한 라우라는 결국 일정을 거부하고, 돌아가던 길에 남자 친구와 차 사고를 당한다. 즉사한 남자 친구와는 달리 찰과상만 입은 채 살아남은 라우라, 그리고 그녀에게 달려간 '베티'.
베티는 작은 도로 옆의 집에서 울타리를 칠하는 중이었다. 한번 라우라와 묘하게 눈을 마주쳤던 베티는 라우라를 구하게 되고, 라우라는 베티의 집에 머물게 된다. 사고로부터 다시 태어난 듯 라우라는 베티와의 삶이 편안하게 스며든다.
빈방의 침구,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의 옷, 지금은 치지 않는 피아노. 라우라는 얼핏 느낀다. 이 집에 지금은 없는 누군가가 살았었다고. 라우라는 베티의 호의를 느끼며 그녀와 함께 정원을 가꾸고 울타리를 칠한다.
베티의 남편과 아들 '막스'가 합류하게 되면서 묘한 긴장감이 더해지며 임시 가족 같은 모습이 된다. 이 두 남자의 직업인 엔지니어는, ‘타불라 라사(완전한 파괴 후 백지상태)'와는 반대인 복원의 이미지로 느껴진다. 그 두 엔지니어로, 이 영화는 더욱 중심을 ‘복원’에 두며, 망가진 세계를 새로 짓기보다 고치기에 초점이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우라가 차린 음식과 케이크를 먹고, 두 남자가 일하는 정비소에서 음악을 듣고 자전거를 타는 어떤 평범한 일상이 며칠 지속된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막스는 라우라가 불편하다. 자신의 부모님도 견딜 수가 없어진다. 이때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 중이던 라우라가 피아노를 치고 세 가족은 슬퍼한다.
알고 보니 피아노의 주인은 '옐레나'라는 죽은 딸이었다. 베티가 라우라를 대용품으로 여겼던 것은 아닐까. 이를 느끼고서 견딜 수 없던 라우라는 아흘간 머물렀던 그 집을 떠나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 애가 괜찮은지 봐야겠어. 라우라가 괜찮은지 봐야겠어."
라우라가 떠났음에도 베티와 가족들은 그녀의 안부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그녀의 연주회에 가게 된다. 라우라는 그들을 발견했음에도 동요치 않고 라벨의 '미러' 3번, '바다 위의 배(Une barque sur l'océan)'를 연주한다.
가족은 옐레나도 라우라도 없지만, 이제 같이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된다. 또한 라우라도 집에 돌아와 옅은 미소를 짓는다.
깨어진 가족, 한번 죽었다 살아난 사람의 '이후'는 어떠할 것인가. 영화는 세상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박리된 감정과 세상을 서로 잇는 시도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상처에는 통풍이 필요하듯이 이들의 이런 회복의 시간은 지나가는 생소하고 지나가는 바람으로 왔다. 김은지 시인의 <반깁스>는 회복의 생경함에 대해 담고있다.
반깁스
시간이 지나면
뼈가 붙는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야
기차처럼 기다란 약봉지
다섯 알
-네 알
-다섯 알
의 시간이 지나면
팩맨 모양으로 부러진 뼈가
다시 동그랗게 된다는 건
궁금한 게 있으면 당장 답을 얻을 수 있고
연락을 기다리는 잠시가 고통인 요즘에
지금 여기는
뼈가 붙는 시간
가위 바위 보 같은
바위 가위 보 같은
가위바위보
이 단단한 부목조차
붕대를 감는 사이
내 다리 모양으로 굳었고
조금 전에 내리기 시작한 눈이
벌써 세상을 덮었는데
한 조각 베어낸 홀케이크처럼 부러진 뼈가
다시 훌케이크처럼 붙는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야
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쓴 시 속에는
호박, 반 고흐, 그리고
하나도 낡지 않은 과학 용어가
기차처럼 이어져 있다
뼈가 부러졌는데 이게 다시 붙는 감각은 당연한 일임에도 신기하고 생경하게 새삼 자각된다. 그 마음은 상실 이 사람들의 피정(retreat)과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오래된 것으로 현재를 깁는 법. '하나도 낡지 않은 과학 용어'와 '기다란 약봉지' 기차 같은 모습. 모든 것을 '당장 답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느리지만 정확한 답을 얻는 것. 라우라도 베티의 가족들도 가장 빠른 답이 아닌, 시간이 필요한 반깁스의 시간을 가장 현실적 최선의 답으로 얻은 것이 아닐까.
감정의 부재와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시도는 마치 바람을 잡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모두 헛된 것은 아님을 <미러 넘버 3>는 건네고 있다. 자신을 구원한 시간은 반깁스처럼 거창하지 않았다는 것을 영화 속 부는 바람을 통해 느낄 수 있다.
페촐트 감독은 "자신을 구원한 시간이 비록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유효한 구원"으로 여전히 아름답고 유의미하다고 말한다.
바람을 잡으려는 시도가 헛되지 않은 이유는, 그 시도 자체가 이미 상실과 함께 사는 법이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지나가는 바람 속에 서 있는 주인공들. 잡히지 않아도, 바람 같은 서로는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비로소 그들은 상처 자체에서 바람이 되어 흐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그리고 바람이 지나가고 나서야 새살이 돋는 것을 본다. 우리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https://youtu.be/bTYUyDjVCRU?si=CnCtviAcwCIQXI0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