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TV에 나오지 않으니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

by 명태

사람은 누구나 지친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영원히 지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계승은 필연적이다.


혁명, 세상을 바꾸는 것은 단 한순간의 스펙타클이 아니다. 이것은 장기전으로 계속 이어져가는 투쟁이다. 그렇기에 다음 세대로의 전승과 더불어 그 세대가 자신들만의 이유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노래 제목과 영화 속 대사처럼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TV에서 방영되는 것은 이미 어제의 뉴스니까 말이다. 현재 진행형의 투쟁은 언제나 TV보다 앞선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제목부터 이미 끝없는 투쟁을 고하고 있다. 이번 전투 다음 또 이어지는 전투. 세상을 바꾸는 일은 한 번의 싸움으로 이뤄지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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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battle after another!"

혁명단체 '프렌치 75'에서 폭탄 제조와 설치를 맡고 있는 '게토 팻'은 '퍼피디아 베벌리힐스'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꾸린다. 하지만 퍼피디아를 스토킹 하게 된 군인 '스티븐 록조'에 의해 이 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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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힌 퍼피디아는 감옥 대신 프렌치 75의 배신자가 되어 자신의 동지들을 불게 되고, 결국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고 갓 태어난 딸을 안고 도망가게 된 '게토 팻'은 새로운 신분인 '밥 퍼거슨'으로 살게 된다.



16년이 흐르고, 프렌치 75로 활동한 시절은 이미 까마득해진 어느 날. 자신과 이미 십대가 된 딸, '윌라'가 위기에 처한다. 백인우월주의 조직 '크리스마스 클럽'에 가입하려는 록조에 의해 혁명의 옛 동지들이 붙잡히고 자신의 거처가 노출되는 일이 발생한다. 밥은 윌라를 구해야 한다.


이런 스토리는 언뜻 보면 아빠가 딸을 구하려는 전형적인 미국 영화처럼 보인다. 과거를 가진 아버지, 구출 대상인 불쌍하고 수동적인 딸, 악당인 테러리스트, 마지막엔 가족의 사랑이 지켜지는 공식이 나오는 그런 영화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경찰국가를 자처하던 이상의 미국이 아닌, 현실의 2020년대 미국이다. 가장 미국적이라 받아들여졌던 시놉시스로 현대의 "미국"을 가장 완벽하게 역설적으로 그려낸다.



한때는 혁명을 부르짖었지만, 조직의 암구호도 까마득한 아버지가 된 밥은 딸을 구출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벗어난다. 이미 일상이 된 이민자들을 지키는 혁명을 진행하는, 윌라의 가라데 선생님인 '세르지오'의 모습과 비교하니 더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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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윌라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무력한 소녀가 아니다. 총도 쏠 줄 알며, 붙잡혀도 기지를 부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렇듯 가장 미국적인 스토리는 인물들에 의해 전복된다.


일련의 사건들 이후, 아빠가 딸을 구하는 스토리는 완전히 바뀐다. 윌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혁명에 뛰어든다. 윌라는 아버지의 유산을 수동적으로 전달받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깨어 자신 세대의 혁명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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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전투는 어제로 끝나지 않았다. 오늘은 어제가 되어도 내일이 온다. One battle after another. 혁명은 한 번의 완벽한 승리가 아니라 이번 전투에서 또 다른 전투로 이어지는 릴레이니까. 진은영 시인의 <어제>을 보면 윌라가 혁명을 재구성 모습이 보인다.


어제

나는 너를 잊었다, 태양이 너무 빛났다
내 집 유리창이 녹아버린다, 벽들이 흘러 내리고
시간의 계곡으로 나는 내려가고 싶다

어릴 적에는 어제를 데려다 키우고 싶었다
오 귀여운 강아지, 강아지들,
내가 굶겨 죽인 수백만 마리

강철 종이의 포크레인으로
어제들의 거대한 공동묘지를 뒤집을까?
오늘 혼자 부르는 노래가 지겹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을 명명한다, 베껴 쓰기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플라톤을 베낀다 마르크스를 베낀다 국가와 혁명을 베낀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베낀다
어떤 목소리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어떤 목소리는 바위에 떨어지는 빗물 같다
오늘의 메마른 곳에 떨어진
어제라는 차가운 물방울

무수한 어제들의 브리콜라주로 오늘의 화환을 메워야 한다
태양이 너무 빛났다, 어제와 장미 향기가 다 증발하기 전에
너를 그려야 한다


"플라톤을 베낀다 마르크스를 베낀다 국가와 혁명을 베낀다"하다 결국 "무엇을 할 것인지"로 베끼는 모습. 더는 어제를 데려다 키우지도 못하고 혼자 부르는 노래는 지겹다. 이제는 베껴 쓰기로 새로이 명명할 때가 온 것이다. 아빠에게서 들은 과거의 혁명을 해체하고, 그 조각들로 다시 자신의 세대를 구성하는 윌라의 모습이 여기 있다.


과거의 외침의 잔향이 사라지기 전, 문 밖을 나서는 윌라는 무수한 어제의 혁명들로 브리콜라주를 구성해 새로운 투쟁을 해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어제'라는 유산을 자신의 방식으로 계승하며 단순한 '브리콜뢰르(손재주꾼)'을 뛰어넘을 것이다. 그녀가 세상을 이해하고 다시 싸우는 방식은 전 세대와는 다를 것이기에. 세상은 여전하고도 변했듯이. 윌라의 그 다름 자체가 혁명에 내일이 있다는 것의 증명이다.


혁명은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끝없이 번역되는 언어가 아닐까. 영화를 보면 '프렌치 75'의 모호하고 거창한 혁명보다 세르지오의 일상이 된 투쟁은 더욱 현실적이고 지속적이다. 누군가에게 혁명은 깃발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며, 그 생존 방식은 이름을 달리해 계속 이어져 오니까. 이 경우, 개인이 지친다고 해서 혁명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일부로 한 번의 완결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가 자기 언어로 다시 써내는 문장이 된다.


그리고 그 문장은 언제나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완벽한 영웅의 서사가 아닌, 각성하는 다음 세대의 모습으로. 한 번의 전투에서 또 다른 전투로 말이다. 이때의 패배는 곧 새로운 시작이 된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혁명은 언어의 형식을 바꿔가며 여전히 살아남는다.


혁명은 죽지 않는다. 다만 문장을 바꿔 이어진다.

이 또한 어제보다 빠르므로 혁명은 TV에서 방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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