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TTHANA 오래된 친구 같은 곳. slow bar : krabi
나는 어쩌다 시리즈 책을 좋아한다. 이번 태국 여행에 어쩌다 방콕을 들고 왔다. 이미 방콕에서 다 읽어버렸지만…
우리 역시 매년 태국을 찾는다. 방콕으로 인해서 치앙마이로 아웃하거나, 치앙마이로 인해서 방콕으로 아웃한다.
그 사이 꼭 들리는 곳이 남부의 크라비다.
어쩌다 방콕의 저자는 “매년 방콕을 찾는 게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단합대회 같다”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도 태국 여행(치앙마이나 또는 크라비)은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크라비 여행은 우리만의 지난 일 년을 정리하고 지금을 맞이하며 내일을 계획하고 서로를 응원하는 여정이다. 보통 두 달씩 태국을 찾는데 크라비는 늘 여행 중반이어서 더더욱 중간 점검 의식이 함께하는 듯하다. 표현이 어색하고 서툴러도 그동안 서로를 위해 애써온 것을 잘 알기에 이제껏처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모종의 우리만의 인사인 셈이다.
크라비에 갈 때마다 나는 ’ 프라타나(Pratthana)’라는 작은 카페를 찾는다. 간판에는 ‘SLOW BAR’라고 적혀 있다. 이름부터 이곳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아오낭 비치나 라일레이 비치처럼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이 아니다. 크라비 타운에서 10분쯤 떨어진, 팍남 강이 흐르는 길가에 조용히 자리한 곳이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외부와 연결된 문은 사실 모두 오픈 도어라 출입구가 따로 있진 않지만) 가장 먼저 나무 향이 난다. 합판으로 마감한 벽면에 파란색 페인트 한 면이 포인트다. 벽에는 오래된 태국어 간판, 빈티지 포스터들, 아버지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다. 말없이 시간을 증언하는 것들이다.
카페 주인은 말이 없다. 묵묵히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뿐이다. 커피를 내리는 그녀의 손끝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편안하다.
처음 갔을 때가 코로나 끝이라 그녀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다음 해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25년 1월엔 개인적인 일로 태국 여행을 패스했지만 이번 여행의 시작이 2025년 12월이었으니 실제로 최근 5년간은 빠짐없이 온 것이다. 그래도 이곳 카페는 2025년엔 오지 않은 셈이다. 이번에 오니 그녀가 마스크를 벗은 맨얼굴로 반긴다.
우리 기억하지? 물론이란다. 나는 마스크 없는 얼굴 처음이네라고 하니 그녀가 빙긋 웃는다. 곧이어 옆 가게에서 누군가 왔고 남편이냐 물으니 우리에게 소개해준다. 우리가 주문한 핸드드립 커피를 그녀의 남편이 내린다. 그녀만이 바리스타가 아닌 것이었다. 주문한 음료가 나왔고 커피는 역시 훌륭했다.
그녀가 커피 내리는 곳은 오밀조밀 그녀만의 규칙으로 만들어진 그녀만의 세계일 테지. 그럼에도 카운터 뒤편으로 보이는 작은 주방은 마치 소녀의 로망이 담긴 부엌 같다. 아기자기하다. 벽에 걸린 다양한 색깔의 드리퍼들, 법랑주전자, 계량스푼들까지. 무심하게 투명 유리병에 담긴 식물들이 곳곳에 놓여 있고, 작은 피규어들이 선반 위에서 손님들을 관찰한다. 초록색 우주복을 입은 피규어, 머리 위에 하얀 유령이 앉은 귀여운 인형. 이 모든 것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방문자의 이야기를 몰래 듣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이 불면 길 건너 팍남 강의 물결이 일렁인다.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상하게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그 소리마저 이곳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철제로 된 아이보리 컬러의 바의자에 앉아 카운터 너머를 바라보면, 일상이 예술이 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카페는 09시 38분에 문을 열고 05시 08분에 문을 닫는다(구글맵에는 오전 10:08-오후 5:08분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8이라는 숫자가 궁금했지만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냥 상상한다. 아마도 주인만 아는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게 무엇이든, 그 의미를 굳이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들은 모르는 채로 두는 게 더 아름답다.
그녀의 남편은 옆 가게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하는 작은 식당도 돕고 가끔 카페 일을 거드는 것 같다. 그림 솜씨가 좋은 아들이 그린 커피 드리퍼와 커피콩 그림으로 만든 스티커를 카페에서 판다. 우리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과 딸이 하교를 했고 우리와 인사를 했다. 딸은 엄마, 아들은 아빠 국화빵이다. 서핑보드를 든 아이가 그려진 머그컵도 있다. 친구들이 만든 카라비너와 머리빗, 리싸리클 소재로 만든 가방 같은 소품과 세컨드핸즈 제품도 판매하고 있었다. 다양한 에나멜 주방용품과 여러 브랜드의 드리퍼들도 진열되어 있다. 메탈릭 한 계량컵에는 카라비너가 달려 있어, 캠핑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할 만한 소품도 눈에 띄었다.
이곳은 마치 오래된 친구의 오래된 가게 같다. 언제 와도 편하고, 늘 같은 모습으로 맞아주는 곳. 아오낭 비치의 화려함도, 라일레이의 비경도, 홍섬 투어의 짜릿함도 좋지만, 가끔은 크라비 타운을 느리게 걸으며 골목을 살피고 무언가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껴보는 것도 좋다.
그러다 이 카페에 들러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바람을 느끼며 오롯이 커피를 마신다. 햇살이 피부에 닿는 것을 느낀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때쯤이면, 내 안의 시계도 느려진 것을 알게 된다..
어쩌다 방콕의 저자가 “우리가 우리이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가 계속 우리일 수 있도록. 방콕을 찾는 건 우리에게 그런 의미가 아닐까 “라고 말했다. 나에게 태국이 그렇다. 우리가 계속 우리일 수 있도록 잠시 멈춰 서게 해주는 곳.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천천히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그리고 수많은 곳 중에 하나가 프라타나인 것이다. 그리고 프라타나는 크라비에서 내가 찾은 나만의 ‘SLOW BAR’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여기에 있을 뿐이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 붉은 피가 흐르는 내 혈관까지 스며들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