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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림의 왕 수니 Sep 11. 2024

여보! 자유가 아니면 외박을 달라!

8개월 - 엄마의 독립선언.

  2023. 03. 봄바람 대신 산후풍이 왔던 봄날.


  치료를 시작으로 바닥났던 체력은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아이는 생후 8개월, 인지와 변별력이 발달하니 이제는 세상 모든 것을 궁금해했다. 거실에 설치한 안전가드를 스스로 열고 여기저기 탐색하기에 바빴고, 나는 따라다니기에 바빴다. 때문에 겨우 회복한 체력은 비축보단 곧바로 소모했다. 하루하루 하루살이같이…


엄마! 탈출이 제일 쉬웠어요.

  더불어 낮잠 시간이 줄어, 그만큼 놀으려 했다. 집안일은 계속 밀렸고, 파워J유형인 나는 계획이 흔들리자 짜증이 치솟았다. 그러다 겨우 재우면 어느새 다시 깨서 두 시간을 넘게 치대며 울었다. 이앓이도 여전했다.아이의 얼굴 보면 짠했지만, 끊임없는 울음소리는 듣기 괴로웠다.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기복에 어느 날은 괴물이 되기도 했다.


  확실히 산후풍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아무도 없는데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미루었던 어린이집 입학을 번복하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기관에 보낼 용기는 없었다. 다른 대책을 고민끝에 남편에게 선언했다.


(육아에서의) 자유가 아니면, 외박을 달라!


  육아로 인한 그간의 피로를 해소하고 싶었다. 주말에 호텔에서 '나 홀로 1박'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남편은 쿨하게 그러라 했다. 아마 그동안의 짜증이 어느 정도 빌드업이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막상 나가자니, 고군분투할 남편이 조금 안쓰러웠다. 엄마를 찾을 딸도 걱정됐다. 무엇보다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당장 집으로 올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따지며 장소를 찾다 보니, 결국 집 근처에 호텔을 예약했다. 도보로 불과 10분 거리였다.

흥분상태로 예약해서 침대 선택을 잘못했다.-_-



호텔 체크인 +1시간.

  아이의 칭얼거림과 울음소리에서 해방되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하얗고 푹신한 침대포는 깃털 위에 누운 기분이었다. 슬슬 허기가 졌다.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이 하나둘 떠올랐다. 휴대폰으로 근처 맛집 정보를 찾았다. 하지만 주말 오후, 황금 같은 자유시간을 웨이팅으로 보내기는 아까웠다. 무엇보다 숙박비도 썼기에 낭비 같았다. 근처에서 참치김밥과 과자 2봉지, 최애 음료인 연유라테를 사왔다.


호텔 체크인+2시간.

  끼니를 때우고 달콤한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호텔 벽에 티브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미디어 노출을 신경 쓰느라, 출산 후에 한 번도 켠 적 없던 티브이였다. 침대에 기대 예능 프로를 보며, 부른 배를 어루만졌다.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었다. 낄낄낄.


호텔 체크인+3시간.

  갑자기 들려오는 "에! 에!!!" 아이의 옹알이 소리에, 나도 모르게 들었던 잠에서 화들짝 깼다. 집이 아님에도 익숙한 환청에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텅 빈 호텔방과 낯선 고요함에 문득 외로워졌다. 코앞에 집을 두고,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나 싶었다.


호텔 체크인+4시간.

 출산 후 처음으로 장시간 외출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문득 남편이 걱정됐다. 전화를 걸었는데 몇 차례나 받지 않았다. 불안했다. 메시지를 보내고 잠시후, 드디어 연결이 됐다. 회사의 급한일로 통화를 하느라 못 받았다 했다. 그 목소리 뒤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로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호텔 체크인+ 5시간.

  숨 가쁘게 걸어 집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큰맘 먹고 하루라도 쉬겠다 한 건데, 결국 또다시 신경 쓰는 상황이 벌어지니 억울했다. 이제 내 인생에서 마음 편히 쉴 날은 없을 것만 같았다. 남편의 잘못도 아니고, 그가 먼저 와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냥 다 화가 났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다시 못 나올게 분명했다. 남편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남편은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었고 괜찮으니 더 쉬고 오라고 했다. 왠지 모를 눈물을 닦으며, 호텔로 되돌아왔다. 분명 아까와 같은 공간이었지만 아무것도 재미가 없어졌다. 잠이라도 실컷 자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쉴 새 없이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이었는지 금방 잊었지만, 분명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바뀐 잠자리 탓일까, 마음 탓일까? 알수 없는 불편함에 뒤척이다 겨우 잠을 청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깨길 반복했고, 밖은 어느새 밝아졌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20분, 첫 수유시간이었다. 나의 신체 리듬은 어느새 아이의 수유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다시 쉬려 했지만 몸도 찌뿌둥했고, 마음은 더 그랬다. 결국 한 시간 뒤에 체크아웃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외박인 듯 외박 아닌 외박 같은, 이 사건에 남편은 껄껄껄 웃으며 왜 이렇게 빨리 왔냐고 했다. 혼자서 힘들었다는 볼멘소리보단 호쾌하게 웃는 모습에 고마웠다. 그리고 약 16시간의 독립운동을 펼쳤던 나는 말했다.


" 사실은 거기 혼자 있는데, 뭘 할지 모르겠더라. 재미도 없고... 평소에 즐겼던 취미라도 있으면, 알차게 보냈을 것 같은데 내가 뭘 좋아했는지도 기억이 안 났어. 그저 쟈니랑 당신 생각만 났고, 계속 불편하더라..." 


남편은 또다시 껄껄껄 웃었고, 나는 이 일로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틈새시간을 내어 취미활동을 시작했다. 하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날부터 남편이 그렇게나 잘생겨 보였다는 것이다.^^ (콩깍지가 매깨고..?)

진양철 회장님이 답하다. -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중


* 2024년에 전하는 여담.

그때 더 쉬고 올걸...ㅠㅠ(죽지도 않고 돌아온 껄무새)그리고 때로는 푹 쉬는 것이 무엇보다 알찬 일이다.



*사진 출처

1.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09042895271

2. https://youtu.be/ERosdTl-beQ?si=YT9QZQ7ol9mhDn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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