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꽃무늬 빵주머니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다. 그곳에다가 빵을 담아서 집까지 가져오라는 신신당부가 뒤따랐다. 빵주머니는 어머니의 섬세한 바느질의 결과물이었다. 어머니는 빨간색 꽃무늬 천을 어디서 구했는지 그것으로 빵주머니를 만들었다. 꽃무늬는 자잘했고, 아주 자잘했고, 하도 많이 있어서 자세히 보아야 그것이 꽃무늬라고 하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한쪽을 바느질을 해서 주머니를 만들고 상단은 또 박음질로 하여 끈으로 홀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끈을 넣고 조으면 빵주머니는 닫히고 그 끈을 나는 한 손에 들고 걸을 수 있었다.
나는 그때 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만 초등학교라 칭했지만 그때는 국민학교라 했다. 빵은 그 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해 나누어 주던 일종의 생활보호 차원의 결과물이었다. 때는 1969년이었고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빵을 기억하고 있다. 빵은 길쭉했고 한 덩어리였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바게트 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맛은 우유를 더 많이 넣고 설탕도 많이 넣어서 그런지 카스테라와 비슷한 맛이 났다. 데니쉬 빵이 그때의 그 빵 맛이 났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데니쉬 빵이라면 사죽을 못쓴다. 뜯어서 조금씩 입안으로 가져가는 쾌감
그러나 집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근 20리 4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원래 살던 정릉천변의 무허가 집들을 헐어버리자 그곳에 살던 우리 집은 하는 수 없이 안암동으로 셋방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서울 종암동의 숭례국민학교에서 안암동의 개운사 입구까지의 길은 국민학교 1학년의 나에게는 쉬운 길이 아니었다.
최악의 코스 중의 한 군데는 고려대학교 정문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고려대에서는 데모가 있었는데 지금의 시점으로 찾아보니 한일 외교 수립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데모였다. 고려대학교 앞에만 가면 메케한 최루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면 나는 앞서 말한 빨간색 빵주머니로 코를 감싸 쥐고 걸었다.
학교에서 고려대학교 정문까지가 대략 1.5킬로미터 내외였다. 그 길을 나는 터벅거리며 걸었다. 그리고 빵 주머니에서 나는 빵냄새의 유혹을 견디면 걸었다. 어머니가 반드시 온전한 빵 한 덩이를 집으로 가져오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손이 빵으로 갔다. 조금만 먹으면 엄마가 뭐라고 하지 않겠지, 엄마도 이해하겠지
빵을 집까지 온전히 보전해서 가져오라는 것은 동생 때문이었다. 아직 취학 전의 동생이 집에서 형이 빵을 가져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온전히 가져가면 그제야 어머니는 그 빵을 공평하게 반으로 갈라 동생과 나에게 주셨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공평한 것이 아닌 내가 불이익을 받는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그런지 손은 더 자주 빵주머니 속을 들락거렸다.
그때 내가 메고 다니던 가방도 생각이 난다. 그것을 일본에서 란도셀이라고 하는 그 가방이었다. 어찌하여 그 가방을 메고 다녔는지는 잘 몰라도 그 가방을 메고 다녔다. 그때 우리는 모두 그런 란도셀 가방을 메고 다녔다. 일본 식민통치기의 유산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작은 아이는 한쪽 손에는 빵주머니를 들고 란도셀 가방을 메고 터덜거리며 오후 2시나 3시의 여름철 길을 걸었다. 배는 고프고 빵에서 나는 냄새는 나를 유혹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가지 고백할 일이 있다. 그것은 동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집안에서 거의 금기처럼 되어 있던 이야기지만 거의 55년이 더 지난 이야기여서 이제는 발설을 하여도 그리 큰 이상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돌아가신 지 8년이 되니 더 이상 숨길 일도 아니다.
그것은 동생의 죽음이었다. 정확히는 6살 난 동생이 그때 당시 홍역을 앓았는데 동네 병원에 데려가서 주사를 맞혔는데 그 주사가 페니실린 주사였다. 동생은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하였다. 국민학교 1학년으로서 무슨 감정을 표현하기도 느끼기에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기억에 남는 일은 어머니의 광기에 가까운 슬픔이었다. 옷을 찢으며 울부짖는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거의 실성할 정도로 울고 떼쓰고 구르고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생떼같이 멀쩡하고 귀엽던 6살짜리 남자아이를 주사 한방으로 잃게 된 어머니로서는 그 충격이 참으로 컸다.
이것이 내가 지상에 나와 처음 맞이한 죽음이었다. 죽음을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 그때 우리 집에 계시던 눈이 어두워 앞을 보지 못하시던 할머니가 살아계셨는데, 어머니는 데려갈 사람은 안 데려가고 생때같은 자식 놈을 데려갔다고 울부짖었다. 그럴 때면 할머니도 글케말이다. 이 눈어두워 누워있는 날 데려가지 그 어린것을 뭐 하려고 데려가냐고 받았다.
그런 할머니도 내가 고등학교 졸업시절 예비고사를 치르던 시절에 돌아가셨다. 그것이 내가 맞이한 생애 두 번째 죽음이었다.
하여간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빨간색 빵주머니가 생각난다. 그 고려대학교 앞에서 나던 메케한 최루가스 냄새가 묻어있던 빵주머니, 그리고 동생과 나누라고 온전한 빵을 집까지 가져오라던 그 어머니의 신신당부까지 잊히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내가 제일 무서워하던 것이 페니실린 주사였다. 그래서 내가 크게 아파 성가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나는 그렇게 되뇌었다. 제발 페니실린 주사는 놓지 말아 주세요.
그러고 보면 그 꽃무늬 빵 주머니에서는 빵냄새와 최루가스 냄새, 죽음의 냄새까지 풍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빨간색 꽃무늬 빵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