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 듣고 했던 제사에 대한 기록을 남겨보고자 한다. 나는 현재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물론 명절 때 차례도 지내지 않는다. 그것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 기록으로 남겨 옛일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제사는 다 알다시피 조상에 대한 예를 표시하는 의례적 행위이다. 기일 전날 저녁에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으로 안다. 요새는 다들 제사를 지내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들이 많다. 사촌 형의 경우 형제가 다섯인데 한 분이 돌아가시고 형제 네 분만 생존해 계신다. 둘째이자 현재 맞이인 형이 제사를 지냈으면 해도 다른 형제들이 잘 따라주지 않고 하여 제사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주된 원인은 기독교의 전파가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다. 기독교에서는 조상에게 절하는 것도 일종의 우상숭배로 치부하여 절하기를 거부한다. 세월이 흘러 교회를 다니는 형제도 있고 하여 사촌형은 제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제사 지내는 것을 대부분 금지한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그렇지 않아도 지내기 싫은 제사를 교회에서 조차 지내지 말라는데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사촌 형은 제사를 지내는 이점에 대하여 힘주어 강조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모든 형제들이 모여 얼굴이라도 한번 보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힘이란 모든 것을 갈래갈래 찢어 놓고 말았다.
나의 경우도 솔직하게 형이 기독교도라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물론 추도예배라고 한다고 하지만 그 추도예배라고 하는 것이 단지 기독교의 예배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할 때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제사의 그 음식을 차리는 수고가 과연 현대에 필요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 제사를 폐하고 지낸다.
내가 본 아버지가 지내던 제사를 회상한다. 제사는 기제사가 있고 명절 차례가 있었다. 당연히 등장인물은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나이다. 이들의 역할이 다 있었다. 아버지는 제주였고, 어머니는 모든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형과 나는 아버지를 따라 시키는 대로 행하며 되었다.
우리 집에서도 제사를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지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내 생계에 쫓기다 보면 제사를 지낼 엄두를 못 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형제의 맏이가 아니었다. 둘째로 아버지의 형님이, 즉 백부가 살아계셨을 때는 그 핑계를 대었다. 하지만 백부 또한 제사에 관해서는 오불관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 백부마저 돌아가시고 구천을 떠도는 부모님에 대한 애틋함으로 아버지는 제사를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대략 대학을 들어간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그때는 형이 체신부 공무원에서 한국통신 KT로 신분변동으로 공사직원이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생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형은 집안의 기둥으로 모든 월급을 어머니께 모두 갖다 바쳤다. 그 덕에 겨우 집안은 경제적으로 숨이라고 쉴 수 있었다. 하여간 그래서 제사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우선 기제사를 생각해 보자. 역곡 아파트 1층의 집안 정면으로 창문이 있었고, 창문 맞은편으로는 미닫이 방문이 있었다. 방문 오른쪽 벽으로 장롱이 하나 놓여 있었다. 창문 밑으로는 앉은뱅이책상, 그것도 아버지가 직접 만든 책상이 있었다. 아버지는 목수였고, 기나긴 겨울에 할 일이 없을 때문 그렇게 책상 따위를 만들곤 했다. 그 책상은 가로 1미터 20 센치미터 정도는 되었다. 제사상은 그 책상과 연이어 놓였고 그것은 장롱과 닿아 있었다. 제사를 지낼 때문 창문을 가리려 병풍을 놓았는데 그 병풍은 평소에는 장롱 위에 올라가 있다가 제사 때만 내려왔다. 그 병풍은 아버지가 어디서 구입했는지는 몰라도 한쪽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있었다. 그 글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나 그 필체만은, 그러니까 독특한 삐침이랄까 하는 것이 생각난다. 뒷면은 사계절의 옛 고유의 풍속화가 펼쳐져 있었다. 물론 제사 때는 추사의 글씨 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는 제사를 지낼 때면 단정히 마고자를 입고 계셨다. 붉은색 상의의 마고자 바지는 옥색의 마고자였다. 그것을 차려입고 아버지는 제사 준비를 했다. 물론 대부분이 어머니가 행하는 것이었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밤, 생밤을 깎아 보기 좋게 제상에 올리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한 솜씨는 가히 아버지를 따라올 만한 사람이 없을 듯했다. 상하 모두 납작하게 만들고 중간은 약간 엇비슷하게 각을 지고 납작한 상하 면을 이루었다. 이것은 밑면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어서 밤은 아랫면, 밑면, 그리고 중간의 두면을 합해 네 면을 이루었다. 나보고 해보라고 해도 아무래도 그 솜씨가 나오지 않았다. 목수의 솜씨, 목수의 눈썰미, 나무를 다루는 부친의 손놀림이었으랴.
제상에는 사과가 한 접시 있었고, 배가 한 접시 있었다. 여기에 북어가 한 마리 올라갔다. 또 젯밥이 한쪽에 있고, 곰국이 있었다. 이 곰국은 소고기와 무를 넣고 끓이고, 고춧가루는 사용하지 않았다. 또 나물접시에는 여러 나물들을 한 대접에 담아내었다. 무나무, 고사리나물, 시금치나물, 미역나물, 취나물 등을 구성되어 있었다. 또 한 칸에는 동태를 포를 떠서 계란을 입혀 지진 동태 전이 있고, 여러 지짐이들, 파전 등이 있었다. 또 한 칸에는 기름에 지진 두부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어머니가 장만하는 것들이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이 모든 것을 준비하면서 방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안에는 남자들만 있었다. 아버지와 형과, 그리고 내가 있었다. 제상에는 밥과 국이 두 명 분이 있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와서 드신다는 개념이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지방이 있었다. 지방은 이곳은 누구의 제사상이라고 하는 것을 알리는 일종의 표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지방은 아버지는 나에게 쓰도록 했다. 옛말에 지방이라도 쓸 줄 알게 서당에 보낸다는 말이 있었다. 까막눈이라도 면하게 하자는 의미이다.
顯妣金海許氏神位
顯考學生府君神位
이렇게 썼었다. 이것을 나에게 맡긴 의미가 있을까? 아버지 또한 서당 3년을 다녔고, 일정시대에 간이학교 3년을 다녔다고 했다. 본인이 쓸 수도 있는 것을 굳이 나에게 맡겼을까? 그것은 대학교라도 나왔다는 아들에 대한 어떤 기대 아니었을까?
나는 그것을 어떻게 썼나? 인터넷을 검색하여 나온 한자를 사인펜으로 한지나 화선지를 잘라 썼다. 그것을 아버지는 제상 앞의 한가운데에 밥풀로 붙였다. 적은 신주를 담은 함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그 지방을 써서 나중에는 그것을 불로 태워 버렸다.
제사의 순서는 처음에는 모든 젯물을 펼쳐두고 밥과 국을 상위에 올렸다. 물론 뒤로 병풍을 쳐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밥을 올리고 아버지와 형, 그리고 나는 절을 했다. 두 번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제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상님들이 식사를 하는 것을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지켜야 했다.
여기에 다시 부친은 형에게 술을 따르라고 하고 밥과 국 앞에 술잔들을 놓았다. 그 술잔을 올리고 아버지는 홀로 절을 했다.
“너희들은 그냥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술을 올리고 다시 앉아 묵상했다. 또 한 번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이윽고 아버지는 부엌을 향해 말씀하셨다.
“물 올려라”
그러면 어머니는 뜨거운 물을 방 안으로 들였다. 그러면 국그릇과 교체하여 놓고 밥숟갈로 밥알 몇 알갱이를 덜어 국그릇에 놓았다. 그리고는 우리를 향해 말했다.
“모두 묵념해라”
그러면 우리는 다시 끓어 앉아 제상을 앞에 두고 묵상했다. 그러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자손들이 잘되어 있음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간다는 것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린 시절 자신이 뛰놀던 벌판을 생각했을까? 일정시대가 끝나고 혼란기에 조부는 장티푸스로 돌아가셨다 한다. 집안사람의 한 사람이 앓자 조부까지 옮아 결국은 그 화를 피해 가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부친과 큰 아버지는 자신의 친부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3년간 했다고 했다. 시묘살이는 묏자리 근처에 움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뫼를 올리고 살피고 하는 행동을 말한다. 대략 1947년으로 추정되는데 그때 나이 아버지 막 20세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의 청춘시절은 그렇게 일제강점기이거나 해방 이후의 격변기였었다.
제사가 끝나고 아버지는 마고자 입은 채로 문 밖에 나가 조상님들을 배웅했다. 그러면 나는 제상머리에 붙여 놓았던 지방을 떼어내 화장실에 가서 그것을 불태웠다. 약간의 매캐한 냄새 그리고 부엌에서 울리던 어머니의 ‘아이고야’ 하는 한숨을 끝으로 제사는 끝이 났다.
제사 끝에 우리는 제상을 방 한가운데로 옮기고 제상에 올렸던 술을 한잔씩 했다.
“한 잔 마셔라, 제사 끝나면 모두 한잔씩 하는 거라”
그러면 우리는 술 한잔을 들고 밥을 먹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한 말씀하셨다.
“이 젯밥이 을매나 맛있노, 느그는 이 맛을 모른데이, 옛날에 제사 끝나면 이 젯밥 얻어먹을 거라고 눈이 벌개서……”
그도 그럴 것이 젯밥을 쌀로만 지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지나온 청춘기에는 쌀로만 지은 밥이 없었다. 모두 보리밥이거나 거의 쌀이 한 주먹에 불과했던 잡곡밥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시대를 살아온 분이셨기에 쌀로만 지었던 젯밥이 그렇게 맛이 있을 수밖에. 지금도 제사 끝나고 아버지가 하시던 그 말씀이 귓가에 아련하다.
젯밥이 을매나 맛있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