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正典 canon)화된 성서 속 예수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즈음 세상은 서로 다른 생각들을 좌나 우, 또는 진보와 보수로 양분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 듯하다. 세상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란 저마다 다 다를 수도 있거니와, 한 사람이 사안에 따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도 있는 법인데도 이편저편으로 딱 갈라 세워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세태는 좀 불편하다.
그러한 이즈음 세속적 관점으로 보자면 성서 속 예수 이야기에 집착하는 입장을 보수라 볼 수 있겠고, 역사 속 예수에 깊이 천착하는 이들을 진보 또는 좌파라 부르기도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가장 꼴통 보수적 신앙의 텃밭인 미국에서 거의 극좌파로 구분할 수 있는 ‘예수 세미나’ 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예수 세미나’는 로버트 W. 펑크, 존 도미니크 크로산 등을 주축으로 20세기말에 미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일련의 연구활동이다.
보수든 진보든, 좌파든 우파든, 역사 속 예수를 연구하던 또는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거룩하신 정통 보수 신앙인들 모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물론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반쯤 죽은 상태에 있다가 그의 측근들에 의해서 어찌어찌 구사일생하여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멀리 일테면 스페인 어디론가 가서 숨어 살다 죽었다던가 하는 소설책들도 있다만 그런 것은 다 허구의 문학작품들이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건은 사실인 동시에 진실임이 명백하다.
그가 왜 그렇게 죽었을까?
그가 한 말 때문이라는 것이 첫 번째 답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말은 예수가 한 첫 번째 설교인 동시에 그의 공생애 동안 한 모든 이야기의 요약이라고 해도 아무 탈 없다. 이렇게 단정 지어 말하는 까닭은 기독교의 좌, 우파 신학자 또는 성서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a, b, c로 곧 a “때가 찼다”, b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c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렇게 나누어서 a, b는 진짜 예수가 한 말 c는 후대에 첨가한 말 이렇게 말하는 학자들로 있지만 뭐 거기까지야 고민할 필요 있겠나?
여하튼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줄기차게 이야기한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요 몇 해 사이 받은 초대장의 대부분은 부고(訃告)다. 이젠 부고의 주인공들이 어르신들이 아니라 내 또래로 점점 변해간다. 지난해와 올 들어 유난히 장례식에 참석하는 횟수가 많았다. 최근에 참석하였던 세 곳의 장례식의 설교자들은 서로 다른 이들이었지만 내용은 엇비슷하였는데 나는 그때마다 “참 아니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 오늘 아무개 집사(성도, 권사, 장로)는 교회를 열심히 섬기시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이 죽음 앞에 서서 우리가 결단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교회 섬기다 하늘나라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지옥불에 던지워질 것입니까?” 내용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김없이 이런 협박성 경고는 빠지지 않았던 것인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야”였다. 설혹 ‘교회’ 대신에 ‘예수’로 말을 바꾼다 하여도 여전히 “아니다”이다. 마치 설교자들이 천국 열쇠를 손에 쥐고서 “너는 들어가고, 당신은 안돼!”하는 어투도 그렇거니와 적어도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 예수로 돌아가자. 예수가 한 말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에서 “다가왔다” 또는 “가까웠다”라는 말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 나라가 이미 온 것이냐(현재완료형) 아니면 곧 올 것(미래형)으로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논쟁은 꽤 오래된 것이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른바 종말론이 이 논쟁에 끼어들게 된다. 또 이야기가 어렵게 나가는 것 같다. 어렵다고 하는 말은 이것은 읽는 이들을 향해하는 말이 아니고 나 스스로 하는 말이다. 쉬운 말이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살며 그를 쫓아다녔던 사람들이나, 예수가 죽은 후(혹 느낌이 안 좋으신 분들에게는 부활승천 후) 그를 믿고 고백했던 첫 무리들(교회)은 그들 당대 곧 그들이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오지 않았고 그들은 그렇게 믿다가 죽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을 하나 생각해 보자. 서기 2000년을 앞두고 있던 1990년대 우리 이민사회도 함께 시끄러웠든 무슨 선교회인가 하는 집단들이 “휴거”운운하며 떠들었던 일 말이다. 종말이 온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런 비슷한 사건들은 지난 이천 년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어 온 일이다. 서기 1000년을 앞두고서 일어났던 세계 종말에 대한 믿음은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놓기까지 하였다. 옛날이야기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을 연결 짓는 일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본다. 하나는 개인의 종말이요, 다른 하나는 역사의 종말 곧 세계의 종말이다.
개인의 종말이야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이다. 그 어떤 변설과 유려한 말로 치장하더라도 죽으면 이 세상은 없다. 세상이 끝난 것이다. 죽은 이에게 지금 여기서 돌아가는 세상은 끝난 것이다.
역사의 종말 곧 세계의 종말에 이르면 참 복잡해진다. 개인의 죽음처럼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 일어날 일들과 세상은 반드시 끝장은 나는데 그 뒷일들을 고민, 고민하다가 만들어 낸 말이 이른바 “피안(彼岸)”, “하늘나라”, “천당”, “천국”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 앞에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 곧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역은 그렇게 가장 중요한 말과 내용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잃게 한다. 많은 이들은 이것이 바로 올바른 성서적 이해라고 믿고 있다.
성서를 통해 보면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해 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일테면 복음서들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그곳이 어떤 곳이냐 하는 명확한 언급은 거의 없다는 점, 심지어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너희가 이 비유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비유들을 알아듣겠느냐?”라고 예수가 말했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에게 철저히 가리어져 있다는 믿음을 심은 것들이 그러한 예이다. 이와 같은 믿음을 아주 논리 정연하게 이론화시킨 사람이 불트만이다.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 보자.
“하나님 나라는 인간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돌, 건설, 그리고 완성은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오직 그 나라의 ‘가까이 옴’, ‘도래’, ‘출현’만이 언급될 뿐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이고 비세상적인 어떤 것이다.”
과연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일까?’, ‘어떤 곳이길래 <그 나라가 다가왔다!>라는 말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