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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진실 사이

by 김영근

성서 정전(canon)화 이후 오랫동안 성서는 필사자들과 성직자들 이른바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다. 당연히 예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문예부흥 이후 인쇄술의 발달과 번역 작업에 힘입어 성서는 급속도로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후 성서는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팔린 부수에 비해 가장 안 읽히는 책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엄청난 판매량에 비해 성서에 대한 이해나 인식 수준은 놀랄만치 낮다. 특별히 보수와 근본주의 신앙에 터 잡고 세워진 미국과 한인교회들은 매우 심한 편이다. 평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설교자들도 신학교에서 당연히 배웠을 성서의 비평학적 이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이해의 능력조차 없는 이들이 많다.(이건 크게 아는 바 없고 생각 짧은 내 생각일 뿐이다) 하여 성서란 다른 어떤 것과 비교되지도 않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절대적 신앙의 대상이라는 것이 많은 교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유영모와 김교신과 함석헌 등에게 생각의 틀을 짜 주었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가 남긴 “성서우상화”에 대한 통박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우상 숭배가 많은 무서운 해독을 가져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서숭배도 또 많은 무서운 해독을 흘러내렸던 것이다”


성서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19세기 들어 일단의 학자들과 문학가들이 역사 속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갖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실제 이 땅을 살다 간 예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물음으로 역사적 예수를 찾는 작업들을 시작한 것이다.


조금 지루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학문이란 게 사실 좀 따분한 것인고로.

슈트라우스라는 신학자가 <예수의 생애>를 발표한 것이 1835년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성서 속 예수 이야기에는 신화 곧 전설이 많이 끼어들었다고 말하며, 이런 역사적이지 않은 사실이 끼어든 것은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의도적으로 사기를 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화적 상상력이 발동한 탓이라고 하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 책 하나를 쓴 까닭으로 평생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격리되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독일에서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나온다. 이들은 신의 아들 또는 신이었던 예수보다는 권위 있는 사람 또는 선생이었던 예수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들이 몰두하였던 사람 예수 연구에 대해 첫 번째 철퇴를 든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인 슈바이처이다.


의사이자 위대한 신학자였던 슈바이처가 “예수의 생애 연구사”를 펴 낸 것은 1906년의 일이다. 슈바이처는 이 책에서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사람 예수는 역사 속에 살다 간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 곧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고 그려서 만든 그들이 좋아하는 예수의 모습일 뿐”(솔직히 슈바이처가 한 본래의 말은 좀 졸리다. 하여 쉽게 풀어써 본 것이다)이라고 통박하였다.


여기에 “역사 속의 예수 연구”에 대해 결정적 쐐기를 박은 사람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불트만이란 사람이다. 그의 말을 쉽게 풀어쓰면 “예수가 어떤 역사적 인물이었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 성서는 오직 예수가 구세주라는 선포에 충실할 뿐이다. 곧 말하는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구세주라는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매우 강력하였다. 적어도 한 세기동안 그의 영향력은 전 유럽을 덮쳤고 한 동안 역사적 예수를 말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러나 학문에 무슨 고수가 있겠는가? 고수가 되었다는 순간 벌써 저 아래 후배가 치고 올라와 한 방에 고수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학문 아닌가? 딱이 뭐 학문뿐이겠나? 그게 세상 이치이지. 그 대단한 불트만에게 잽을 날리며 “역사적 예수 이야기 없이 어떻게 신의 아들 예수 이야기가 나오랴?”하며 역사 속 예수 이야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불트만의 제자들인 케제만, 보른캄 등이었다. 그 케제만 아래서 대단한 한인 신학자 한 명이 나오니 그가 안병무이다. 안병무 목사 – 이른바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사람이며 세계 신학계에 한국말 “민중”을 알린 사람이다.


역사 속의 예수를 찾아 나선다고 하면서 왜 이리 지루한 이야기를 하는고 하면 이게 내 이야기가 아니고 근 일 백 년 이상 썩 대단한 사람들이 찾아 나섰던 길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함이다.


성서는 신앙적 고백의 집산이다. 일테면 ‘처녀가 애를 낳다”라는 사실 하나를 보자. 믿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면 호박씨 까는 소리에 불과할 것이지만 믿는 눈으로 보면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은 진실일 수 있다. 나는 사실이라 하지 않고 진실이라고 말하였다. 믿음은 그런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바닷물을 소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과학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고 인증해 보니 그렇게 될 수도 있다’하면 그것은 이미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다 그런 것이다. 믿음은 그냥 믿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서야 할 것이 있다. 그 믿음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하는 물음이다. 역사 속 예수를 찾아 나서는 길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믿음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하는 판단을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저마다 제 믿음이 한 수 하는 것인데 도대체 어떤 믿음이 진짜 참 순수 원조냐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즐겨 이야기하는 예화가 하나 있다.

중세시대 있었던 이야기이다. 신심(信心) 깊은 수도승 한 분이 계셨다. 평생 수도원에서 절제의 삶을 살며 이 수도승이 연구에 몰두한 일이 있다. ‘바늘 끝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을까?’라는 연구였다. 이 연구로 평생을 산 수도승의 이야기. 지금 우리들의 눈높이로 보면 ‘이런 미친놈이 있나?’이겠지만 그는 처절하였을 것이며 진지하였고 그것이 자기의 삶의 목적이라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웃을 일 하나 아니다. 21세기 이 문명의 땅에서 나는 믿음이라는 허울로 중세의 수도승처럼 정말 미친 짓하는 수많은 이웃들을 보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때론 그 숱한 이웃들 가운데서 내 모습을 찾을 때도 있다.


신학이란 인간학이란 말이 있다. 옳은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제 ‘삶의 자리’에서 제 값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를 찾아내는 일은 바로 그 옳은 믿음으로 가는 길을 밝히는 일이다.


사족: 진실과 사실, 그 차이와 차이의 폭을 아는 일, 그게 바로 믿음이다. 이거 참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믿으면 다 된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그저 웃는다.

다만 차이와 폭 사이에 제삿밥이 없다면, 그 제삿밥에 눈독 들이는 세력이나 개인이 없다면 나도 동의하겠다. 믿으면 다 된다는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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