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주일인 오늘 예배시간에 부른 찬송 중 하나, <어머니의 넓은 사랑>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넓은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로 시작하는 이 찬송은 유년시절부터 많이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찬송 2절을 부를 때면 늘 머뭇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깊게 남아 있습니다. 2절 가사입니다. <아침저녁 읽으시던 어머니의 성경책 손때남은 구절마다 모습 본듯합니다>
교회 잘 다녀야 한다고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셨던 어머니가 성경책을 읽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문맹이셨습니다. 초등학교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어머니는 영어는 물론이고, 한글도 읽거나 쓰지 못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어머니는 지극히 상식적인 분이셨습니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남의 것을 탐해서는 안 된다거나 부족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등의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에 충실했던 분이셨습니다. ‘사람은 사람 같아야 사람이다’ 말을 즐겨 쓰곤 하셨습니다. 때때로 엉뚱한 당신의 고집조차 상식적인 사람살이라고 우기시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딸 셋, 아들 하나를 다 키우시고 다들 짝을 찾고 난 뒤인 쉰 넘은 나이에 한글을 깨치셔서 성경도 읽게 되셨고, 영어로 당신의 이름 정도는 쓰실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제일 으뜸가는 관심은 가족이었습니다. 일흔 새해 동안을 함께 사신 아버지의 하루 세끼 식사는 물론 자식들의 건강과 안녕이 가장 우선하는 그녀의 관심사였습니다. 세 딸들은 비교적 그런 어머니의 바람대로 잘 살아온 듯합니다만, 아들인 저와는 그렇게 잘 맞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 저는 어머니의 속을 많이 썩였었습니다. 제 꿈이 너무 컸던 탓이었는데, 어머니는 그런 제 꿈들을 모두 헛꿈이라고 말하곤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고, 어머니의 초청으로 크게 내키지 않았던 미국 이민을 오던 때 어머니가 제게 하셨던 말씀이랍니다. “이놈아! 이젠 헛꿈들일랑 다 버리고 열심히 일하고 살어! 작업복 몇 벌만 가지고 와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
그렇게 시작된 세탁소였습니다. 그 무렵 윌밍톤과 뉴왁시 일대에는 70군데 가까운 세탁소들을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었답니다. 서로 간의 정보도 교환하고 상호 이익을 위해 힘을 합쳐 보자는 생각으로 세탁인 협회를 만들고, 나아가 델라웨어 한인 사회 일을 맡아서 하고,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들을 위한 신문을 만드는 저를 보시며 어머니는 혀를 차셨습니다. “쯧쯧, 네 팔자다! 아직도 헛꿈을 버리지 못하니… “
그런 어머니를 제가 이해하게 된 것은 제 나이 예순이 거의 다 되어서였습니다. 세탁소가 제 천직임을 깨달은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이젠 그 세탁협회도 없어지고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 중 아직도 세탁소를 하고 있는 사람은 제가 유일하답니다.
오늘은 어머니주일이자 오 년 전 어머니가 아흔 세 해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시고 돌아가신 날입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제 책상머리 위에서 저를 지켜보고 계시답니다. 사진 속 어머니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어머니는 꼭 한 말씀 남기시곤 합니다. 지난 오 년 동안 가장 많이 하셨던 말씀은 살아생전과 똑같으셨습니다. “쯔쯔쯔… 이눔아! 넌 맨날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이 많다냐?”
그런데 오늘 건네신 말씀은 아주 다르셨습니다. 생전 어머니가 입에 달고 사셨던 말씀을 건네주셨답니다.
“얘야! 그저 감사구나!. 감사하다! 그저 감사하며 살아라!”
오 년 전 어머니의 마지막 며칠을 함께 했던 시간들을 되새깁니다.
어머니의 숨소리에 얹혀 전해 온 어머니의 세월과 나의 세월들이 그 숨소리의 강약과 편함과 힘듦과 거침과 고요함에 따라 함께 발맞추며 흐르던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들은 그야말로 고요함과 평안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시간 이후일겁니다. 제 입에서도 ‘감사하다’가 잦게 이어지는 날들 말입니다.
그 해 어머니 주일은 어머니가 돌아가기시 바로 전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어머니의 아파트 창문 너머 누군가 그려 놓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고백이 마치 제가 그린 것처럼 제 사진첩에 남아있습니다.
그게 또 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