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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자람

by 김영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세상은 온통 초록뿐이다. 여름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 색깔의 생명은 늘 한시적이다. 색깔이 변하는 그 사이에 세상 모든 것들은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웃자란다.



오늘 얼굴색 하얀 손님 하나가 물었다. “한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더군요. 당신도 투표하셨나요?” 순간 마음속에서 뱉은 말은 ‘당신은 한국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수 있나요?’였지만, 튀어나온 말은 “에고, 저는 미국 시민인걸요.”였다. 이젠 상대의 나이 가늠엔 전혀 자신이 없는 내 눈에 오십대로 보이는 백인 여성 손님은 제법 세상 뉴스에 밝은 듯 보였고, 이번 주초에 있었던 한국 뉴스도 제법 꿰고 있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여기도 한국 같은 일이 일어나면 참 좋겠구먼요!”


이번에 스물한 번째 대통령을 뽑았다는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나는 단 한 번도 투표를 해 본 경험이 없다. 첫 대통령인 이승만 시대에 태어난 내가 나이 스물이 되어 투표할 수 있을 나이가 될 무렵, 이른바 유신시대가 되어 직접선거가 없어졌다. 다시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접 투표해 뽑을 때가 되었을 즈음엔 나는 그 땅을 떠난 이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중 국적을 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될 즈음에, 한국 대통령 선거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중국적을 취득하려 하다가 접고 만 까닭은 단지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이젠 돌아가 살 것도 아닌데 그 공동체의 결정에 생각 하나 얹는다는 게 왠지 낯 간지럽게 부끄러웠었다.



우리 내외 이민 초기에 폴란드계 미국인들의 축제에 함께 했던 적이 있었다. 폴란드계 가톨릭 사립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고 있던 이웃이 초대해서 가본 자리였다. 그야말로 시끌벅적한 큰 잔치자리였다. 그 무리들에 섞여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하며 즐기고 있었는데, 웬 사내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와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얼굴이 벌겋게 취기가 가득 달아오른 사내가 뱉은 말이었다. “에이 이 중국 놈들아! 너희 나라로 꺼져버려!”


주변에 사람들이 술 취한 사내를 다독거리며 말렸지만 사내는 더욱 거칠게 달려들며 소리를 쳤었다.

그 사내의 거친 목소리를 닫게 한 것은 아내가 내지른 외마디였다. “알았어! 네가 꺼진 다음에!”

그렇게 세월 흘러 여기에 누울 자리 마련한 한국계 미국인이 되었다.



사람살이 다 제 생각하기 나름일 터이지만, 살다 보니 “여기도 한국 같은 일이 일어나면 참 좋겠구먼요!”라는 말에 슬그머니 신도 나고 자랑스럽기도 한 내 어머니의 나라다.


무릇 웃자라는 게 여름철 푸르름뿐이랴! 세상 제일 더딘 것 같아도 어느 순간 불쑥 웃자라는 게 사람살이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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