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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장애 – 그 감사에

by 김영근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 전도서 2:24(표준 새 번역에서)


아주 오래 계획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뜬금없는 일도 아니었다. 몇 주 동안 살 집을 보러 다녔다.


오래전부터 차분하고 꼼꼼하게 세운 계획은 없지만 생각은 늘 이어져 왔었다. 아이들 다 자라 각기 제 짝 찾아 품을 떠났고, 지난해 아버님을 마지막으로 부모님 네 분도 다 세상 뜨셨기에 그저 막연히 이어져왔던 생각을 이룰 때가 된 것 같기에 나선 일이었다.


삼십 년 가까이 산 이 집이 발목을 잡고 놓지 않는 정(情)은 여전하였지만, 지금이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딱히 뜬금없다고도 말할 수는 없을게다. 살며 몇 차례 집안 페인팅을 하면서 시간이 지나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둔 자리가 한 곳 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옆 한쪽 벽면이다. 그곳엔 우리 두 아이들의 키 눈금들이 그려져 있다. 이 집에 처음 이사 온 날부터 아이들이 다 자란 때까지 성장 일기가 키 눈금으로 남아있다.


이 집이 나를 붙잡고 있는 가장 큰 정(情)이다.


감사하게도 우리 내외는 아직은 나이에 걸맞은 건강 상태로 살고 있다. 그렇다한들 이젠 노인시대로 들어섰음을 부인할 재간은 없다. 몇 해 전부터 노인시대를 맞으며 조금씩 실천하고 있는 일은 버리고 줄이는 일이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차례대로 떠나신 장모, 장인, 어머니,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지혜다.


바로 그 버리고 줄이는 일을 결정적으로 크게 벌려보는 일이 이사와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생각이 든 것은 계획된 일도 아니었고, 그야말로 뜬금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집을 보러 다녔다. 마침 오랫동안 부동산 중개업을 해 온 지인이 하나 있어 그의 도움을 받았다. 물론 그에게 이야기를 꺼내기 전 온라인상에서 두루두루 이런저런 정보들을 접한 후였다. 그렇게 우리 내외의 현재 상황과 요구하는 조건들을 지인에게 전하며 소개를 부탁했다. 그는 ‘딱 맞는 때’라는 말과 함께 많은 실제 정보들을 안내해 주었고, 여러 집들을 보여주었다. 노인 전용 주거 콘도부터 작은 크기의 단층 주택들이었는데, 모두 ‘혹’하는 부분들과 ‘이건 아닌데…’하는 것들이 섞여 있었다.


바쁜 지인의 시간을 무작정 뺏기도 참말 미안한 일이기도 하고(그는 자기 직업이라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만), 그렇다고 내 삶의 마지막 선택이 될 일에 우리 내외가 서로 정말 동의하며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는 일이 쉽지 않기에 잠시 쉬어 가기로 한 것은 어제였다. 일단 시장에 나오는 정보는 천천히 내가 스크린을 한 뒤, ‘정말 이거다’ 싶으면 지인에게 부탁하기로 한 일이다.


아직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끄는 정이 사뭇 깊은가 보다.




이즈음 틈틈이 성서 전도서와 함께 읽고 있는 책이 한 권 있다. 김기석 목사가 쓴 전도서 강해서인 <지혜의 언어들>이다.

그 책 중 밑줄 그어 간직한 한 대목이다.


<톨스토이의 저작 가운데 ‘세 가지 질문’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일종의 결정장애를 느끼는 왕의 질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때는 언제인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현자는 왕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전체 줄거리를 통해 이 소설이 들려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가장 소중한 때는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해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 대목이 내게 주는 감사가 크다. 비록 지금 내가 결정장애를 겪고 있는 순간이긴 하지만, 아내와 함께 지금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함께 겪고 있는 이 시간들이야말로 내겐 그 어떤 감사로도 모자랄 은총의 시간이 아닐는지.


또 다른 삶의 과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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