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한다는 착각

by 김영근

감기 몸살 정도는 사나흘 정도, 아니 길어야 한 주간을 넘기지 않고 물리곤 하였습니다.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고요. 타이레놀이나 에드빌 기껏해야 감기약인 로비투신 한 병이면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제 기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기억 때문에 그렇게 믿고는 있습니다만, 그게 실제 정확한 일인지는 가물합니다.


콧물이 줄줄 흐르며 시작했던 감기 증상이 내일모레면 딱 두 주 째인데 아직도 영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아프거나 열이 있거나 목이 붓거나 하는 증상 등은 다 가라앉았지만 여진처럼 잔기침이 이어지고 있답니다. 물론 응급으로 의사를 찾아 검진도 받고 이런저런 검사도 받았답니다. 코빗이나 폐렴 등 특별한 증상도 없고 나이에 비해 건강 상태도 양호하답니다. 다만 이즈음 유행하는 감기가 머무는 기간이 좀 길다는 이야기는 들었답니다.


의사 앞에 서게 되면 늘 받게 되는 질문 가운데 하나이지요. 가족병력 말입니다. 특히 부모님의 병력이지요. 부모님들은 장수하셨던 편이고 두 분 모두 특별한 병력 없이 그저 노환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로 떠나셨기에 저는 그런 물음 앞에서 늘 ‘없음’으로 답하곤 합니다만, 기억컨대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약 반년 정도 ‘기억’과 씨름을 하셨습니다. 이른바 가벼운 알츠하이머 증상을 보이셨답니다.

당시 어머니는 종종 전쟁 속을 헤매곤 하셨습니다. 이즈음엔 한국전쟁으로 이름이 굳어졌습니다만 어머니에겐 6.25 전쟁이었지요. 어머니의 기억이 머문 곳은 늘 피난길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얼추 일흔 해 전인 당신의 스무 무렵으로 돌아가 계시곤 했었답니다.




신간 서적 안내 이메일을 보다가 눈길을 끈 책 제목이었습니다. <기억한다는 착각>


이즈음 들어 종종 제 기억들에 대한 의심이 일곤 하는 일들이 잦습니다. 아침에 있던 일이 저녁나절이면 까만 것은 물론이고 조금 전 일도 뒤돌아서면 새까매지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러하니 아주 또렷한 오래전 기억들에 대한 의구심이 일곤 하기도 한답니다.

그런 제게 책 선전문이 유혹으로 다가왔답니다.


- <기억한다는 착각>은 (과학자인 저자인) 그의 첫 대중서로,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기억에 대해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깨고 기억이 감정, 장소, 현재 상태 등 여러 요소에 따라 변화하는 유동적 존재임을 밝혀낸다. 기억뿐 아니라 망각이 왜 중요하며 어떻게 기억을 잘 사용할 수 있는지 실용적인 방법부터 가짜 뉴스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안까지 기억에 관해 우리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담았다. –


그 선전문에 혹해서 주문했던 책이랍니다. ‘나는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잊어버릴까’라는 부제가 붙은 캘리포니아대학교 심리학 및 신경과학교수인 차란 란가나스(Charan Rangamath) 가 쓴 <기억한다는 착각>이랍니다.


여러 날 째 책장 한 번 안 넘기고 책상 모퉁이에 쌓여 있던 것들 중 하나였는데, 오늘 아침 손에 들게 된 까닭은 뉴스 한 꼭지 때문이었습니다. ‘의원들은 타운 미팅이 힘들다’는 NBC 뉴스였습니다. 트럼프 천하에서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연방의원이든 주의원이든 타운 미팅을 두려워한다는 기사 내용인데, 트럼프의 여러 정책들- 관세, 이민, 의료보험, 가자지구를 비롯한 외교 등등- 전반에 대해 민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다들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사는 세상에서 <뉴스와 기억>에 대한 호기심도 일고해서 손에 들었던 것이랍니다.


일단 책이 재미있습니다. 인도계 이민 일세인 저자의 기억경험이 역시 이민 일세대인 제게 많은 부분 가깝게 다가와 읽기 쉬운 책이었습니다. 다만 뇌과학자의 책이다 보니 뇌는커녕 과학이라는 말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제게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았답니다. 그가 아주 쉽게 설명하려고 애쓴 임상실험 이야기라든지 전두엽도 아니고 전전두엽피질이니 해마니… 하는 용어들도 그렇고, 건성으로 책장을 넘긴 부분들도 많지만, 참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무엇보다 제 기억에 대한 감사와 늘그막에 제 십 대에서 삼십 대 초입까지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옛 친구들과 소식 나누며 사는 오늘에 대한 감사를 그치지 않게 한 책이었답니다.


기억이야말로 새로운 시간들을 뜻있게 맞는 열쇠라는 생각으로, 책 속 밑줄 친 몇 대목.



<여러 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통해 우리가 스스로 내린 결정의 결과에서 얻는 행복감과 만족감이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 오는 것임을 증명했다.>


<뇌는 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가 몸을 위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뇌에도 좋다. 나아가 기억력에도 좋다. 잠, 운동, 건강한 식사 등….. 이런 요소들이 한꺼번에 합쳐지면, 나이를 먹어도 기억력이 보존될 수 있다.>


<과거를 돌아볼 때 우리는 특정한 시기, 즉 열 살부터 서른 살 사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 시기의 기억이 이렇게 우세한 것을 ‘회고 절정(reminiscence bump)’이라고 부른다. 이 현상은 사람들에게 살면서 겪은 일을 회상해 보라고 요구할 때 분명히 드러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나 책, 음악에 대해 줄줄 이야기할 때에도 간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이 하나의 인간으로 형성되는 그 시절에 들은 노래나 그때 본 영화에는 그 사람이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과 그 사람 자신을 연결시켜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가 있다.>


**국화 핀 뜰을 환하게 밝히는 반달 뜬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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