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에

by 김영근

동네는 아직 꽁꽁 언 눈들이 한 자 가웃 덮여 있는데 오늘이 입춘이란다. 낮시간은 확연히 느낄 정도로 길어졌건만 추위는 가실 줄을 모르고, 뉴스들은 하루하루 내 어렸던 시절처럼 점점 겨울공화국 소식들 뿐이다.


엊그제 동네 뉴스를 보고 기겁을 했었다. 델라웨어대학교(UD, 엄밀하게는 사립대학이지만 주립대학 취급을 받는 델라웨어주 최고의 대학이다. 내 삶의 터전인 세탁소의 가장 큰 주 고객이며 내 아이가 다닌 학교이기도 하다, 이건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비록 시골대학교라고 하여도 해마다 이런저런 대학 평가 기관에서 한국 서울대학교보다는 몇 단계 윗자리로 평가받는 학교이다.)에 대한 뉴스였다.


그런데 이 놈의 대학교가 노예제와 지역 흑인 공동체의 역사를 다룬 학생·교수 연구 웹사이트를 삭제하는 결정을 내리고 그예 삭제했다는 뉴스였다.


해당 연구는 노예제, 토지 수탈, 자유 흑인 공동체 형성 등과 맺어온 복잡한 역사적 연관성을 지역 사회와 함께 발굴·공유하는 공공 역사 프로젝트였다.


문제는 이런 연구 과정과 결과를 알려주는 웹사이트를 삭제한 배경에 제2기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연방 교육부의 압박과 연방 보조금 유지에 대한 대학의 우려와 맞물려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트럼프 행정부의 역사 지우기의 일환 특히 인종 차별 역사 지우기이며 소수 민족(흑인) 역사 교육의 위축 나아가 학문적 자유 침해를 유발한 사건이었다.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려는지 답답한 어제오늘이었다. 이즈음 종종 보게 되는 뉴스나 그에 달린 댓글들이다. ‘이 나라의 끝은…’,‘미국이 언제부터 이랬나…’,‘미국이 어쩌다…’ 등인데 사실은 다 예견된 일이라는 생각이고, 크게 새로울 것도 없다. 지난 이 나라의 역사를 훑어보면 늘 안고 있는 문제였다.


이젠 다들 잊고 지내지만 베트남 반전운동이 한창이던 때, 내 젊음이 또 다른 이유로 ‘We shall overcome’을 어깨동무하며 읊조려 부를 때, 이 땅의 젊은이들이 무장한 이 땅이 주방위군과 경찰들에 의해 죽고 다치던 시절을 생각하면 권력은 늘 하나같았다.


인종, 이민, 국제적 패권 등의 국내외 모든 갈등들은 끊임없이 도돌이표처럼 이어져온 일들이었다. 지나치게 원초적인 트럼프의 권력 모델이 갈등을 극대화하여 노출된 상황이 아닐까 싶을 뿐이다.


허긴 역사의 모든 전쟁들과 국가의 쇠망은 권력의 원초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할 때 일어나곤 한다는 두려움도 있다만, 거기까지는 가지 않으리라는 역사적 경험을 기반한 희망이 더욱 크다.


그렇게 입춘을 맞는 뉴스 속보를 저녁에 접했다.

<델라웨어 대학교는 캠퍼스 문화·다양성 전략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노예제와 지역 역사에 관한 학생·교수 연구 웹페이지를 의도치 않게 비공개로 전환했으며, 이 조치가 학문 활동을 억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데 대해 유감을 표하고 자료를 복원했다.>는 뉴스였다.


이래서 희망이다. 비록 대학 측은 <캠퍼스 문화 및 참여(Campus Culture and Engagement) 전략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일부 프로그램 웹사이트를 비공개로 전환했으며, 이 과정에 노예제와 지역 역사 관련 학술 자료가 포함되었다고 밝혔다. 대학은 이를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설명하며 자료를 복원했고, 공동체에 혼란과 우려를 준 점에 대해 사과했다.>고 하지만, 권력과 돈의 힘 앞에 일시적이나마 학문의 자유를 포기했던 과오는 밝혀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기간 안에 잘못된 판단을 접게 된 계기를 곱씹어야만 한다. 그래서 아직은 희망이다.


지금은 쌓인 눈조차 녹지 않는 춥고 시린 입춘이다만 딱 두 해전 입춘에 남긴 내 일기에는 봄이었다.

사람살이 매양 그런게 아닐까? 누군가는 따듯한 입춘을 기억할 터이고, 누군가에겐 춥고 시린 겨울 입춘이 생각날 터이고…



<두 해 전 오늘 일기>


종종 신비로운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오늘 같은 날이다.


1.


아침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마주친 것은 호주에 계신 홍길복목사님께서 보내주신 설교문이었다. 은퇴 후 그가 행한 <죽음 – 제3의 이민>라는 주제로 이어지는 설교문 중 하나로 <끝이 좋아야 합니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양 옆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이야기를 주제로 한 설교였다. 설교문의 마지막 문단 중 몇 개의 문장들이다.


<인생의 마무리는 죽음입니다. 잘 죽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 잘 죽기를 바랍니다. 끝내기를 잘해야 합니다. ……. <유종의 미>를 영어로는 Crowning glory, <면류관을 쓰는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맨 나중에 웃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 인생의 최고 정점, 최대의 peak time은 죽음입니다. 죽을 때 잘못 죽으면 일생을 망치게 되고, 죽을 때 아름답게 마무리하면 그의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지만 끝이 나쁘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 우리는 이제 점점 죽음의 순간을 가까이 대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갑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갑니다> 찬송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2.


오전엔 아내가 읽어 보라고 권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쓴 장편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을 손에 들었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며 아내가 건네주었던 책인데 그 이유 때문에 차일피일 내 독서목록에서 밀려 있던 책이었다. 무슨 수상자나 수상작품이라는 치장이 달린 글들은 내게 썩 다가오지를 않는다.


말이 장편이지 고작 135쪽일 뿐인 중편으로도 짧은 축이었다. 그저 잠시 훑을 요량으로 들었던 책인데 책장을 덮을 때까지 엉덩이를 떼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 내린 마치 단편 같은 소설이다.


소설은 주인공 요한네스가 태어나던 날 몇 시간과 그가 죽던 날 하루에 대한 기록인데 그의 할아버지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오대에 걸친 이야기들이 녹아있다. 하여 단편인 동시에 장편이다.


생명의 탄생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죽음의 일상성이랄까 죽음이란 마치 평범한 삶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겪는 일 가운데 하나의 과정인 듯 이야기한다.


요한네스를 다음 세상으로 데려가기 위해 잠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 먼저 죽은 그의 절친 페테르가 전하는 다음 세상을 설명하는 말이다. <자네가 사랑하는 것은 거기 다 있다네. 사랑하지 않는 건 없고 말이야>


3.


오후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뵙다. 나를 보자마자 하시던 말씀.


“아이고, 내가 너를 기다렸어요. 이제 내가 떠날 준비를 해야 돼요. 내 장례식 때 말이야… 네 엄마가 해 준 한복을 입고 가려고 했는데…. 그게 아무래도 오줌 눌 때 아주 불편할 거 같아서… 그냥 양복하고 … 여름철 거든 겨울철 거든 철은 따질 거 없어요…. 그거 입히고 네 엄마가 해준 반코트 있어… 그거 좀 입혀 줘.”


이즈음 들어 많이 오락가락하시는 아버지의 부탁이었다.


날은 여전히 쌀쌀한데 햇볕은 아주 따스한 날이다. 내 뜰에는 어느새 수선화 튤립 등이 싹을 틔어 오르고 크로커스는 이미 활짝 웃고 있다. 보라색 크로커스의 꽃말이란다. ‘누군가를 후회 없이 사랑한다’라던가….


살아가는 날까지 끊임없이 사랑하고 볼 일이다. 그게 가는 날까지 천국에서 사는 일이고, 떠나서 만나는 이들은 어차피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들뿐이기에.


죽음을 논하는 아침에서 삶을 노래하는 저녁까지…


오! 이 신비한 하루에 감사.


홍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는 내일을 위하여….


내 쉬는 날 일상의 하나… 오늘은 달콤한 사과빵을 만들어 아내에게 맛 보이다.


**** 아버님은 이 날로부터 딱 5개월이 지난 후 어머님이 마련해 주셨던 코트를 입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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