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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light May 26. 2019

정부 주도로 중화학공업육성은 됐는데, 벤처는 왜 안됐나

IT정책과 관련해 정부에 대한 신뢰는 상중하로 했을때 하에 가깝다.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상투적인 정책들이 쏟아진다.  특히 대통령 임기를 기준으로 어떤 분야에서 이런 성과를 내겠다는 숫자로 표현하는 보도자료는 이제 보고 있기가 민망해질 정도다.


벤처기업 정책 또한 마찬가지. 이런저런 지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꽤 하는거 같은데, 성과 측면에선 업계 관계자들은 할말들이 참 많다는 표정이다. 정부 지원금에 대해 눈먼돈, 안받으면 손해라는 얘기가 들린지도 오래다. 그러다 보니 정부 주도형 정책에 대한 신뢰는 계속해서 하락하는 분위기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래도 이게 최선일까?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쓴 '외환위기와 그후의 한국경제'는 IMF 이후 한국 정부가 추진했던 벤처기업 육성 정책이 거시 경제 측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경제학자 입장에서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책을 읽고 거시 경제 성과 측면에서 정부 주도의 벤처 정책은 전면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에서 벤처 기업 육성은 IMF 위기 이후 줄어든 투자를 늘리기 위한 일환으로 정부 주도로 강도높게 추진됐다


한국은 외환 위기 후 재벌 기업을 대체할 투자 주체를 육성하려고 노력해왔다. 김대중 정부는 벤처 기업 육성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외국인 직접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벤처 기업 육성은 김영상 정부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 하에서 큰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재벌 중심 경제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의 주역으로 벤처 기업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외환 위기 후 급증한 실업, 그중에서도 교육 받은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벤처 기업의 역할에 주목했다.
한국의 벤처 기업은 미국 등 선진국에서의 벤처 기업이 아니라 좀더 일반적으로 정의한 첨단 기술 중소 기업이다. 미국드 등 선진국에서 벤처 기업은 벤처캐피털이나 엔젤 투자 등 모험 자본의 고위험-고수익 투자로 설립한 기업을 의미한다. 반면 한국의 벤처 기업들은 그런 기업들 뿐 아니라 정책적 판단에 의해 정의된 기업들을 포함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한국의 벤처 기업은 정부의 인증을 기준으로 해서 법적으로 정의되는 존재다. 그렇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당시 벤처 기업 육성이 벤처캐피털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 주도로 첨단 기술 중소 기업의 창업을 활성화한다는 목표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벤처기업 확인 제도를 통해 지원 대상 기업을 선별하고, 그 기업에 실제로 지원을 함과 동시에 금융 기관 같은 시장 참여자에게 정부가 선별한 기업이 우량 기업이라는 신호를 주려고 했다.


하지만 저자는 김대중 정부의 벤처 정책은 오버했다는 입장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흥미롭다. 중화학공업육성정책의 경우 그대로 나름 정부가 큰 역할을 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벤처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정부에 앞장 서는 것은 득보단 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벤처 기업 육성은 방향은 맞았으나 과도했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 공업화 정책과 비슷한 점이 있다. 벤처 기업 육성 정책이 과도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바로 외환위기 이후 실업 대란을 타개할 주요 정책 수단으로 구상했기 때문이다. 벤처 기업은 그 속성상, 소수집단일수 밖에 없으므로 그 육성을 통해 단기적으로 대규모의 고용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는 벤처 기업으로 출발해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기업들이 다수 등장하는 먼 미래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단기간에 실업 대란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정부가 온갖 방안을 동원해서 급격히 육성하려 한 것은 지속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벤처기업 고용 인력은 1998년 약 7만6000명에서 2001년 36만 5000명까지 급속히 늘었지만 2002년에는 약 32만8000명으로 줄었고, 2005년까지 2001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단기간에 벤처 기업을 육성하는 정책은 정부의 실패를 가져왔다. 그것은 과거 1960~1970년대의 정부 기업이 정경 유착, 관치금융, 재벌체제 등으로 표현되는 정부의 실패를 수반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외환 위기 후 벤처 기업 육성은 1960~1970년대 만큼 정부가 광범위하게 개입하지는 않았고 정치가 민주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부패가 개입할 여지도 상대적으로 작았다. 그런 한편 1960~1970년대 정부보다 정부의 실패를 유발할 여지는 오히려 큰 측면도 있었다. 
1960~1970년대 정부 개입은 기업의 성과를 판단하는 궁극적 기준으로 수출이라는 객관적 지표가 있는데다 중화학 공업화의 경우 정부 지원이 소수의 재벌 기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정부가 그들 기업의 성과를 판단하기 쉬웠다. 반면에 벤처 기업 육성에는 그런 조건이 없었다. 어떤 기업이 진정한 벤처 기업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정부를 포함한 외부자가 알기는 어렵다. 따라서 벤처 기업 인증을 신청하거나 정책자금에 지원했을 때 부적격자가 선정되고 적격자가 탈락할 수도 있었다. 정부가 벤처 기업 육성 정책을 서둘러서 마련했기 때문에 그러한 부적격자가 선정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런 조건에서 학연, 지연, 혈연을 이용해서 금융기관, 경제부처, 사정기관, 정치인 등이 모두 가담한 권력형 부정 사태로서의 벤처 스캔틀이 연달아 터졌다. 
이런 혼선을 겪은 후 벤처기업 지원 제도는 시장 건전화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벤처 기업 육성은 김대중 정부 초기에 정부 주도로 급격하게 추진하다가 각종 문제를 일으킨 후 그 추진력이 약화되었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때는 벤처 기업 육성이 정책에서 상대적으로 우선순위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정보통신부가 폐지되었다. 박근혜 정부가 다시 벤처 기업 육성을 강조했고, 현 정부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 성과가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한 평가는 아직 하기 어렵다. 다만 한국의 벤처 기업 육성이 아직도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벤처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정하고 투자를 담당하는 역할을 해주려면 정부 주도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스스로 자생력이 있어야할 것이다. 첨단 기술 중소 기업 육성에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고, 초기에는 더욱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부 주도가 지속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정권은 바뀌어도 정부 주도형 벤처 정책이 계속되는 이유가 말까? 저자는 이렇게 진단한다.


벤처기업 발전에 계속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데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렇게 된 것은 한국 정부나 민간 부문의 '변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외환 위기 후 20여년이 경과하면서 민간의 역할이 정부 역할을 대체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 경제, 사회 전체의 성격 때문이다. 벤처기업이 제대로 자라기 위해선느 금융, 교육, 과학 기술 등 국가 전체의 시스템이 변해야 한다. 한국은 이 모든 분야에서 정부가 강력한 영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현상으로 1960년대 정부의 적극적 역할 정도가 아니라 그 전 수백년 이상 역사를 가진 관료사회 내니 국가 우위 사회의 유산일 것이다. 즉, 관료 사회와 신중상주의 체제의 유산을 극복하고 자유주의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외환위기 후 구조 개혁과 벤처기업 육성을 결합한 것이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외환 위기 후 신자유주의적 요구를 이용해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그런 시도가 일격에 자유주의 체제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뿌리 깊은 역사적 조건을 무시한채 재벌을 급격하게 구조조정하면서, 그로 인해 투자가 감소하는 자리를 벤처기업 육성으로 메우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IT나 벤처 정책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치 않다고는 보지 않는다. 나름의 역할을 계속 해줘야 한다고 보는 쪽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정부는 지금 민간을 리드하기는 전문성이 많이 부족하다. 정부 스스로의 전문성을 강화해야 하는 시점이다. 한국에서 IT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정부는 거대한 시장이다. 중소 기업에게는 특히, 구매자로서 정부가 갖는 중량감은 크다.


그러나 정부 관련 사업이 국내 기업들에게 의미있는 레퍼런스가 되는지는 의문이다. 해외 시장을 노크할 때 국내 IT기업이 삼성전자에 솔루션을 넣었다는 것은 몰라도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한국  정부 어디어디에 공급했다는 것이 홍보에 도움이 됐다는 얘기는 많이 듣지 못했다. 레퍼런스로서 미국 정부가 갖는 밸류와 한국 정부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한국 공공 기관들은 좀더 유능한 ICT 구매자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제갑을 주고 사돼 기업들에게 글로벌 수준의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그들의 역량을 판단할 수 있는 내공을 갖췄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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