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앤톡]축적의길의 저자 이정동 교수가 던진 화두
퍼스트 무버는 언제부터인가 한국 경제 도약의 중량감 있는 키워드로 인식돼왔다. 남들이 한거 빨리빨리 따라하는 패스트 팔로워가 아니라 남들이 안해본걸 처음 시도하는 퍼스트 무버형 기업들이 많아야,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정동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자신의 책 '축적의 길'에서 퍼스트 무버는 필승 전략의 키워드가 아니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퍼스트 무버가 아니라, 아이디어의 가치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역량, 다시 말해 스케일업 파워를 갖추는 것이 한국 경제 도약의 길이라는게 그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앤드 루빈이 만든 안드로이드는 구글의 스케일업 역량 덕분에 빛을 보았고, 한국에서 개발된 HANA 메모리 DB 기술도 SAP의 스케일업 역량이 있었기에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 확산될 수 있었다. 결국, 최초의 아이디어보다는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개념 설계 역량이 승부를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회사를 팔려고 찾아온 앤드 루빈의 제안을 거절한 것에 대해 땅을 치고 후회할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하드웨어가 강한 삼성전자에게 구글 같은 스케일업 역량이 당시에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퍼스트 무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패스트 팔로워가 되어야하는것일까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까 ? 정답은 퍼스트냐 세컨드냐는 전혀 중요치 않다이다.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많이 시도하고, 시행착오를 꾸준히 축적하면서,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를 스케일업해서, 마침내 완성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패스트 팔로워에서 퍼스트 무버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행 중심의 사고 방식에서 개념 설계 중심의 사고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산업 구조는 개념 설계 역량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교육, 기업 경영, 금융, 정부 정책 모두가 그동안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끈 패스트 팔로우형 빠른 실행을 지원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교육 분야의 현실을 지적하기위해 저자는 중학교 2학년 가정 교과 시험 문제를 예로 든다.
깍두기를 담글때 무는 3cm크기로 팔모썰기를 한다.
미역국을 끊일때 미역은 찬물에 불려 4cm 길이로 썬다.
도라지 오이생체에 들어가는 도라지는 6cm 길이로 얇게 찢어 소금을 넣고 주물러 씻는다.
감자 볶음을 할때 감자는 0.5cm, 당근과 양파는 0.3cm 두께로 채썬다.
정답은 1번이란다. 이 사례는 우리 교육 체계의 초점이 새로운 개념 설계에 도전하고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끈질기게 버텨내는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금융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됐다.
불행하게도 한국 금융 시스템은 혁신적 개념 설계를 평가할 수 있는 역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그런 전문적 역량을 위해 투자해 나갈 인센티브도 크지 않다. 지금까지 한국 산업은 대부분 수입된 개념 설계의 실행을 담당했기 때문에, 위험이 그리 크지도 않았고, 따라서 평가할 기술적 전문성을 키울 필요도 크지 않았다. 쉽게 말해 금융 시스템 전반이 실행 역량을 지원하는 관행에 익숙해져 있는 셈이다. 그래서 경제 규모도 커졌고, 이에 따라 금융 산업 전반도 커졌지만 여전히 아파트 담보에 근거한 소매 대출이 은행권 대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형적 형태가 되었다.
정부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4차 산업 혁명과 관련한 논의가 활발하지만 이 새로운 기술 혁신의 흐름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패턴을 보더라도 전형적으로 실수 없이 벤치마킹하는 실행자 루틴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속하게 4차 산업 혁명 관련 태스크 포스를 만들고 선진국과 챔피언 기업등릐 동향을 비교표로 만들고, 우리의 현황과 대비하여 장단점과 위기, 강약점 및 기회위협요인 분석을 통해 대응 전략의 우선 순위를 빨리 정한다. 비전, 목표, 실행 전략을 하나의 그림으로 요약하고 예산을 긴급히 조정 편성해서, 일단 자원의 플로우를 재조정한다. 관련 조직이나 기관을 급히 신설하고 다른 업무에 있던 사람을 순환보직시켜 배치한다.
1년에 100개 완료처럼 단기적으로 확인 가능한 가시적 목표를 설정하거나 한국형 000개발처럼 벤치마킹 대상이 되는 기술 선진국의 개념 설계를 변형시켜 유사한 버전 개발을 목표로 제시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4차 산업혁명 이라는 키워드가 시들해지고, 다른 키워드가 떠오르면 지금까지의 일들은 없던 것으로 하고, 위의 여러가지 일들을 새로운 키워드에 맞춰 다시 반복할 것이다. 이제 마음의 프레임 자체를 빨리빨리에서 장기적 지평으로 전환하고 도전적 시행착오의 경험을 꾸준히 축적해 나가는 기술 선진국의 마인드로 바꿀 때다.
저자는 퍼스트 무버와 함께 거리를 둬야할 또 하나의 키워드로 선택과 집중을 꼽는다. 선택과 집중은 많은 실패를 통한 시행착오를 통해 얻게 되는 개념 설계와는 상극이라는 이유에서다.
선택과 집중에 기초한 빅베팅 전략이 습관화되면서, 단기적, 가시적 성과를 선호하게 되고, 너무 많은 것을 걸었기 때문에 실패의 비용이 커져서, 자연스럽게 시행착오를 용인하게 어려운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스스로 단계별로 리뷰하고, 성공이든 실패든, 그 과정에서의 경험을 꼼꼼하게 기록해서 남기기 보다 그 시점에서 가장 주목받고 떠오르는 벤치마킹 정보를 컨설팅 받고, 빠르게 찾아내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산업계의 개념설계 역량을 돕기 위한 정부 정책도 선택과 집중형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성장 동력을 찾고, 일시적으로 자원을 집중 동원 하다가 또 다른 신성장 동력으로 옮기는 방식은 축적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해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도 4차 산업 혁명과 관련하여 그의 모든 정부부처로부터 긴급하게 대응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단기 성과 위주의 선택과 집중형 사고 방식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책적으로 그동안 기술혁신의 위험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공공 연구 개발 투자를 급속히 늘려왔다. 그러나 혁신 아이디어를 실험해볼 수 있는 초기 시장을 만들어주는 정책은 그리 발달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 혁신 지향적 공공 구매 정책 등이 크게 관심을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정책 담당자 입장에서 부담해야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혁신 활동에 대한 공적 지원 프로그램은 지나치게 다양하고 많지만, 대부분이 정책 담당자 입장에서 위험이 크지 않은 안전한 공급 위주의 기술 개발 지원 정책, 쉽게 말해, 돈 나누어주기 정책에 치우칠수 밖에 없다."
선택과 집중을 대체할 키워드는 스몰베팅 스케일업 프레임이다. 실패를 하더라도 작게 많은 것을 시도해보고, 그중에서 될만한 것들을 키워 나가는 이른바 스몰베팅 스케일업 프레임이다.
"스몰베팅 스케일업 프레임을 만들려면 기업들은 파일럿 투자를 활성화해야 한다. 동시에 단계별로 투자해 나가는 스케일업 투자 전략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정동 교수 외에 애덤 그랜트도 자신의 책 오리지널스에서 선발주자의 위험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늦더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관련글] 크롬과 파이어폭스 사용자가 더 독창적이라고?
"놀랍게도 선발주자가 되면 유리한 점들보다 불리한 점들이 많았다. 개척자들이 더 높은 시장 점유율을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생존 가능성 뿐만 아니라 수익률도 더 낮았다. 개척자는 선불주자로서 특정 상품을 처음으로 개발하거나 판매한 회사이다. 정착자는 상품의 개발이나 판매를 늦추고 개척자들이 시장을 조성한 후에야 시장에 진입한 회사들이다. 골더와 텔리스가 서로 다른 부류의 상품들을 생산하는 수백가지 트렌드를 분석한 결과 실패율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타났다. 개척자들의 실패율은 47%인 반면, 정착자들의 실패율은 겨우 8%였따. 개척자들이 살아 남는다고 해도 시장 점유율은 평균 10퍼센트에 불과했고, 정착자들의 시장 점유율 28%와 차이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