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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딜라이트R May 16. 2023

드디어 나에게도 꿈이 생겼어요.

20년동안, 자신 있게 장래희망을 적어내던 친구가 가장 부러웠었다.

어릴 적 가장 곤욕스러운 질문은

"장래희망을 적어보세요."였다.


도대체 뭐를 써야 하는 거지?


나는 그저 윗집 사는 엄마친구아들이 수영을 하니까 엉겁결에 함께 배우며 학교대표 수영선수가 되었고,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하셔서 7살 때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피아노 과외를 받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도 몰라서 수동적으로 학습했었던 것 같다.


B딜라이트R의 초등학교, 고등학교 기록부

학교에서는 매년 장래희망을 물었다.

의무감에 '수영선수', '피아니스트', '아나운서', '선생님' 등 그냥 아무거나 작성해서 제출해 왔다. 지금 생각해도 그 순간은 정말 괴로웠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살고 있는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 매일 고민했고, 꿈이 있어서 눈이 반짝이는 친구가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멋있고 훌륭해 보였다. 항상 그런 친구에게 다가가서 왜 그 일이 하고 싶은지, 어떻게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 물어보았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저 친구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우리 오빠(친남매)는 뮤지션이다.

온 가족이 반대하는 음악을 하겠다고 많은 반항을 하며, 인생을 그 일에 올인했었다.

그때 그런 열정이 있는 오빠가 참 멋있었다.



"나도 오빠처럼 열정과 마음을 쓰고 싶은데 무엇에 쏟아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많이 찾고 싶고, 알고 싶고, 몰입하고 싶어."

"야, 테니스 친다고 생각해. 공이 너한테 막 날아와. 그 공을 맞추려고 쫓아가야 맞추는 거지. 이런저런 일에 관심을 더 가지고 다양한 경험을 해봐."


관심과 다양한 경험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시간은 무심히도 빨리 지나갔고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다.


당시 유행이었던 관광가이드에 관심이 생겨서 관광학과에 진학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나의 영어실력을 너무 잘 알았고... 관광가이드로의 비전이 잘 보이지 않으셨는지, 단호히 반대하셔서 재수를 하게 되었다.


20살을 맞이하는 송구영신예배 때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올해에는 제발 꿈을 갖게 해 주세요.'


1월부터 4월까지 성인이 된 친구들과 매일같이 술을 먹었다. 아마도 술살이 4kg 정도 쪘을 것이다.

20년 인생 몸무게 최대 신기록이었다.

그뿐이랴, 이제 내 용돈 내가 벌어서 신나게 쓰겠다 싶어서 다양한 아르바이트도 했다.


누가 봐도 나는 재수생이 아니었다. 공부를 안 했으니까..ㅎ...


보다 못한 어머니가 필리핀 단기선교를 제안했다. 기간은 1~2주 정도였고,

교회에서 단체로 가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아 참여했다.


선교지에서 본 광경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낭만적으로만 보였던 수중가옥의 실상은 가난해서 살 수 있는 땅이 없는 사람들이 바다 위에 집을 지은 것이었고, 오물로 인해 까매진 바닷물과 까만 모래 위를 사람들은 맨발로 다닌다. 신발이 없는 주민은 작은 상처를 통해 파상풍을 얻기도 하고, 파상풍으로 발이나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우리 집 화장실만 한 공간에서 13명의 가족들이 살았고, 음식 위에는 해충들이 앉아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그대로 두고 먹는 모습들... 쓰레기더미에서 쓰레기를 모아서 살림을 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았다.


'우리는 같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비위생적이고 불안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야 하지?'


가슴속에 작은 의문이 심겼다.


한국에 돌아와서 죽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교회에서 운영하는 방과후공부방 유료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방과후공부방은 지역아동센터가 생기기 전, 방임아동, 가출청소년들의 학습지도 및 보호를 해주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과 중학교 1, 2학년 가출 여학생을 만났다.

가정에서 적절한 지원과 지도, 사랑을 받지 못해서 또래 친구들보다 학습과정이 느렸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고, 사회책 한 문장을 이어서 읽지 못하는 등)

참 예쁘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친구들이었다.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엑소시스트 계단소녀 모습을 흉내 내며 나에게 달려왔다.

(아래는 참고사진 ㅎㅎ;)

<엑소시스트 영화 장면 中>


빠르게 기어 오더니 내 무릎에 풀썩 앉아서 웃는 표정과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선생님, 애들이 저한테 냄새난다고 놀려요."


아이는 도배도 안된 집에서 방임아동으로 발견되어,

방과후공부방에서 식사와 학습을 돕고 있는 아동이었다.

해맑은 얼굴로 말하는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찢어졌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뭐라 대답했었는지도 기억 안 난다.


이후 아르바이트를 하러 죽집에 갔다.


'죽'은 웰빙(well-bing)이 유행했던 당시, 비싼 슬로푸드에 속하여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메뉴였다. 그곳에서 엄마와 온 8~9살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원피스를 입고 소파 위를 뛰어다닌다.


'아.. 우리 방과후공부방 아이들도 같은 또래인데,

저 아이는 예쁜 옷을 입고 엄마와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며 식당에서 즐겁게 뛰어다니네.

우리 아이들은 저런 경험도 없이 바짓가랑이가 해지도록 매일 같은 옷을 입어 친구들에게 놀림당하고,

부모의 사랑을 느껴보지도 못하는데...

지금 이렇게 다른 데 어른이 되어서는 얼마나 차이가 날까.


쿵.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눈물이 핑돌아 얼른 시선을 돌렸다.

무기력, 무능함이 느껴져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사회복지"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더라도,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어떠한 상황 속(성별, 국가, 장애, 소득, 가정환경 등)에 있더라도

모두가 공정한 기회를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이바지해야겠다.

누구도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지킬 수 있는 사회복지정책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자!


사회복지를 해야겠다.


이때가 9월이었다.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나는 재수생이었다.

수능을 준비해야겠다. 두 달 남았는데, 어느 학교를 갈지 먼저 정하고 공부하자.


처음 독서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 집 경제상황이 여의치 않아 학원도 다니지 않았고, 혼자 공부했다.


11월 수능, 선택과목 만점, 수능점수는 노력한 만큼 나왔던 것 같다.(이후 지망하는 학교에 합격했다.)


송구영신 예배가 돌아왔다.

새해를 맞이하며, 내 작년 기도제목이 뭐였지? 다시 꺼내보니,


"꿈을 갖게 해 주세요."


꿈이 생겼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숨이 벅차게 기뻤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심을 처음 느껴서였을까.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새벽 밤하늘에는 별이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았다.

소망이 내 얼굴 앞으로 빛줄기처럼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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