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에게 주는 복
언제 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영화 <잔다르크>.
프랑스에 많은 승리를 안겨 준 잔다르크는 국가의 영웅이 되어,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이를 시기한 프랑스 왕은 전쟁 중 잔다르크를 영국(적국)에 넘겨주었고, 마녀로 몰린 그녀는 결국 화형에 처해진다. 화형 당하기 전, 옥중에 있는 잔다르크에게 잔다르크의 의식(허상?)이 말한다.
너는 진실을 보지 않고 네가 원하는 것을 본 거야.
신의 계시라 믿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온 잔다르크에게, 그것이 정말 신의 계시가 맞았느냐, 너의 망상이지 않았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이 장면은 뇌리에 잘 새겨져 종종 불안감을 안겨주었었다.
'하나님, 내 소망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내 욕심인 건 아닌가요. 이렇게 사는 게 맞나요? 내 신념은 내가 원하는 생각들로만 가득한 것은 아닌가요?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요?'
아마 2009년도 이후로 7년, 7년간 끈질기게 질문했었다.
왜 7년 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세어보니 7년이었고,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6번 확인했었다.
그래도 불안하여 계속 질문했었고, 방송모금 했을 때쯤 7번째 확인을 하며 불안이 소강되었다.
국제협력사업비 모금방법으로는 방송모금이 가장 좋다.
절대적 빈곤 속에 있는 사람들의 삶은 글과 사진보다는 영상으로 전달하는 것이 비교적 호소력이 높기 때문이다.
본방사수 시청자들의 후원 전화를 유도하려면 방송사례의 어려운 현실을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영상이 필요하다.
그렇다. '빈곤포르노'라고도 하는 그런 영상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표현한다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척 자극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이 없으면 대상자 지원에 대한 시청자들의 공감대 형성이 어렵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재미있는 기부방법, 즐거운 모금방송은 지원 필요성에 대한 전달력이 떨어져 후원 신청 전화를 걸게 하기 역부족이다.
모든 모금방송은 소중한 후원금으로 제작된다.
방송 기획, 방송사 컨택, 출연대상자(지원 대상자, 셀럽, MC 등) 섭외, 영상 촬영 및 제작에 일반적으로 약 3개월~7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
장기간 높은 비용으로 준비한 모금방송은 ROI를 고려하여 더 많은 후원자와 기부금을 모집해야 한다.
왜 후원금을 많이 사용해서 더 많은 후원자와 기부금을 모집하려 하느냐고?
NGO(또는 NPO) 조직은 미션과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 미션과 비전에 공감하고 동의해 주는 사람들을 계속하여 끈질기게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회통합', '빈곤 없는 세상', '모든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 '지구환경보호', '세계평화' 등과 같은 언젠가 달성할 수 있는 미션과 비전 실현에 기여하는 복지사업들을 그날이 될 때까지 지속시켜야 하기에.
방송모금을 할 때, 2~3달에 한 번씩은 개발도상국에 갔다.
방송촬영할 때에는 PD, 셀럽, 수행인력, 현지어 통역사, 운전기사가 필요하고 관련 출장비만 몇천만 원이다.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찾아가 방송사례를 찾는 일은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방송모금 성공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은 단연 "방송사례(콘텐츠)"이고, 정해진 기한 내에 방송주인공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NGO조직의 사업을 책임질 수 있는 대표적인 방송사례가 되려면 다양한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영상으로 가난함이 전달될 수 있는 열악한 주거환경, 생사를 오갈 것 같은 모습의 어린아이, 보이기에도 극심한 질병 속에 있는 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아동, 가장이 된 어린이, 굶고 있는 많은 식구들, 호감형 외모와 뻔하지 않은 개인 스토리...
방송사례 후보 가정집을 방문할 때, 방송될 가망이 낮은 집은 빨리 스킵해야 한다.
다녀야 할 지역이 많고, 안전 상 낮에만 다닐 수 있다. 방송사례를 찾게 되면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고르고 고르고 골라서 최종적으로 방송국에 선택받을 수 있는 매력적인 콘텐츠여야만 한다. 어느 방송사례 후보가정을 가도 쉽게 만족되지 않는다.
방송모금팀 팀장이 된 후 초반에 갔던 출장지는 코트디부아르였다.
방송사례 발굴 일정은 보통 새벽기상, 6~17시 마을방문, 17~19시 이동 및 저녁식사, 19~20시 개인정비, 20~22시 사례 정리 및 랩업회의, 익일 일정 계획, 22~24시 익일 마을방문 준비용품 정비 및 출장비 정산, 취침으로 이루어진다.
출장기간 중에는 늘 시간에 쫓긴다. 방송사례가 안될 집은 방문 2초 만에도 판단해서 지나쳤었다.
한 개 마을에 있는 가정 모두를 이렇게 지나치고 다른 마을로 이동하려 할 때, 현지를 안내해주는 프로젝트 매니져님이 갑자기 나에게 화를 내셨다.
"팀장님은 마음이 안 아파요? 어떻게 이런 아이들을 보고 그냥 지나칩니까? 사랑이 안 느껴지네요."
"매니져님, 저도 마음 아파요. 그런데 지금 본 아이들을 모두 도우려면, 우리 사업을 더 대표할 수 있는 아이를 찾아야 해요.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어요. 이 많은 아이들 모두에게 무거운 감정을 계속 느끼고 다니면 어떻게 이 과업을 마무리할 수 있겠어요.."
'사랑이 안 느껴진다고? 클라이언트 한 명, 한 명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사업을 하면 어떻게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나? 모든 사람은 안타깝지요. 그 안타까움은 내 삶 속에도 있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그런 공감보다는 방송사례를 빠르게 찾아낼 수 있는 감각과 우연으로라도 방송사례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도우심 뿐이에요!'
매니져님은 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팀장이라는 사람이 아이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더 품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하셨다는 걸 알고 느꼈기에 크게 개의치 않고 남은 일정을 순조롭게 마무리했었다.
시간이 흘러 새해를 맞이했다.
매년 새해가 되면, 교회에서는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는데, 출근을 핑계 삼아 토요일 하루만 나갔다. 그날 새벽 찬양 콰이어를 섰었다.
목사님의 말씀은 한 주간 <나의 십자가>에 관련한 주제로 이어졌다. 십자가 앞, 뒤, 옆, 대각선이라는 포인트로 말씀을 전하셨었다.
콰이어를 서서 찬양을 하는 중 잠시동안 회중들에게 기도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십자가, 그 십자가의 앞, 뒤, 옆, 대각선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명을 주셨나요?"
목사님의 말씀이 귀에 꽂혔다.
'그러게요, 제 십자가 앞, 뒤, 옆, 대각선에는 무엇이 있어요? 제 사명은 제가 생각한 것이 맞나요?'
졸리고 피곤한 상태로 성의 없이 물었는데, 갑자기 내 감은 눈 앞에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 가족들부터 그 시절 방과후공부방에서 만났던 아이들, 복지관에서 만난 여성결혼이민자 분들, 국내사업을 하며 만났던 장애아동가정, 얼마 전 코트디부아르에서 만난 아이들. 2초도 만나지 않았던 그 마을 아이들의 환한 얼굴이 한 명, 한 명 선명하게 눈앞을 지나간다.
'뭐지? 내 기억력?? 어떻게 이 아이들이 다 떠오르지?'
사회복지를 해야겠다는 소망을 품은 나의 처음이 떠올랐고, 아이들을 무심히 지나쳤던 내 모습이 부끄러우면서 환하게 웃어줬던 아이들의 얼굴에 고마웠다.
그리고는 지난날 예배 때 들었던 설교말씀이 떠올랐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애통하는 마음은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보았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 긍휼한 마음, 사랑이 가득해서 느낄 수 있는 아픔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아픔을 느낀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데 그 복이 위로 래요. 그 위로란, 사명을 뜻합니다.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찾게 하십니다."
내가 느낀 것은 애통하는 마음이었을까?
'그것이 사명인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 맞는지, 더 이상 의심하고 묻지 않겠습니다.
변방에 있고, 소외받고 있고, 연약하고,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에 더욱 힘써보겠습니다.
그게 무슨 일이든 내 손에 맡겨지는 일들은 더 능력 있고 지혜롭게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제 안에 더욱 사랑이 가득하게 해 주세요. 사랑 많은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기도가 바뀌었다.
의심, 경직됨, 불안과 두려움이 사랑하는 마음과 기대감, 설레임, 진중함, 담대함으로 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