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으로(이정하)’를 읽고 내가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반추
벌써 8년쯤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이 있다.
나도 처음에는 회원이었는데 하나둘 각자의 이유로 떠나가더니 어느새 회장이 되었다.
회장이 된 이야기는 서서히 하기로 하고, 이것은 내가 독서모임에서 선정한 ‘인생의 역사(신형철)’에 관한 이야기다.
신형철 작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책으로 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이렇게 이성과 감성이 완벽한 비율로 조화된 사람이 있나 싶을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다.
부끄럽지만 집 공간 부족을 이유로 책을 잘 구매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책은 읽은 다음 바로 소장하였고 책이 워낙 무겁게 다가와서 자주 읽지는 못했다. 그러다 한참 지나 우연히 그의 문장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네가 태어났을 때 내가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경고했다는 이야기.
조심하라고. 네가 나를 필요하다 느끼는 마지막날까지 나는 살아있어야 한다고 …
나는 조심할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각오할 것이다. 빗방울조차도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을게. 죽어도 죽지 않을게.’
너무도 오랜만에 머리가 띵하고 양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한 문장을 만났다.
사실 저 부분은 모든 문장이 다 귀하고 강하고 훔치고 싶을 정도로 소중한데 전부 옮길 수 없음이 안타깝다. 궁금하신 분들은 꼭 ‘인생의 역사’를 읽어보시길.
이후 이어진 글들에서도 신형철 작가는 내게 호감 그 이상으로 존경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감상의 여운이 진하게 남은 뒤 나는 그처럼 시를 읽고 내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했고 나의 발제는 무조건 이것이었다.
‘시를 읽고 시화 써보기.’
우리 모임은 글을 쓰는게 아니라 읽는 모임이었기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했지만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글을 읽는 사람은 각자의 이유로 쓰고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각자 글은 모임 전날까지 나에게 메일로 보내면 인쇄 후 익명으로 다같이 돌려보며 무조건 칭찬감상을 남기기로 했다. 칭찬만 하기로 한 것은, 무엇보다 내가 비평이나 피드백 따위 받고 싶지 않았고 일주일 내내 고심해서 쓴 글에 대해 서로 좋은 말만 해주어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그 날 모임에서 너무나 멋진 시와 글을 많이 만났고, 내 글에 대해서도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역시 칭찬은 고래도, 독서모임 회원도 회장도 춤추게한다.
브런치의 첫 글을 어떤 주제로 써야하나 많이 고민했는데, 작심1일 인생에서 제일 꾸준히 하고있는 독서모임과 또한 내 인생에서 제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존재가 같이 녹아 있는 글을 남기는 것이 의미있을 것 같다.
아래는 당시 시 '낮은 곳으로(이정하)'를 읽고 적은 시화 비스무리한 것이다.
낮은 곳으로 -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 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잠겨 죽을 시간이 없어요~ 마시면서 배우는 사랑에 대해>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는 구절에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 급으로 크게 치인 적이 있었다. 이 문장을 영어 숙어를 외우듯 틈틈이 중얼거렸고, 누군가 감성적으로 적어놓은 캘리그라피를 SNS 프로필로 올려놓았으며, 나중에 타투를 한다면 이 문장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 당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희생적이고 일방적이며 아가페적인 사랑을 했다. 또 그런 내 모습에 흠뻑 취해있었다.
그렇다, 덕질이었다.
지금은 그 오빠를 멀리서나마(물론 그때도 실제로는 매우 멀었으나) 응원하며 덕질은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었지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찾아 들어가 앉아서 밀물을 기다리는 마음을 생각해보면 실은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 밀물은 언제, 얼만큼 온다는 예고도 없다. 망부석처럼 기다려도 내가 앉아있는 곳까지 오지 않을 수도, 오더라도 내가 처박혀있는 이 공간을 적시지도 못할 정도로 찔끔 왔다 갈지도, 혹은 너무 넘쳐서 잠겨 죽게 만들 수도 있다. 이보다 더 숭고할 수는 없는, 인생 최대의 사랑이라 자부하였으나 돌아보면 매우 치기어린 마음이었다. 단언컨대 잠겨 죽으면 좋,지 않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어야 내가 넘치게 받은 사랑을 다시 돌려줄 수 있으며 그 회신까지가 사랑이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거침없고 맹목적인 사랑을 받아보니 나는 이제 더 이상 밀물이 오면 잠겨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 가끔은 너무 깊게 잠겨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사랑이 언제까지고 나에게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줄 알고 여유롭게 잠영하다 어느새 다가온 썰물 때에 정신차리고 보면 맞닿을 당연한 공기가 두렵게 느껴진다. 갑자기 터진 숨이 반갑기는커녕 다시 잠식하고 싶어 멀어지는 물을 붙잡는 나를 상상한다. 그 끝은 당연히 서글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다가 물 튄 곳은 없는지, 부딪혀 다치진 않았는지, 길은 제대로 찾아왔는지 살펴본 뒤 엉덩이 툭툭 털어주고 그 마음 두 손으로 곱게 모아두었다가 다시 썰물로 멋지게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한다.
그것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아름다운 뒷모습*일 것이고, 아이를 세상에 데려온 자의 숙명이자 의무이자 사랑의 완성일 것이다.
*이형기(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