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커밋 #96
애인을 만나러 강남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어제 비가 와서일까 아침부터 제법 쌀쌀했기 때문에 겉옷을 챙겨 입고 나갔는데 날씨가 예상보다 춥지 않았다. 대중교통은 매정하게도 에어컨 바람 한 줌 틀어주지 않았고, 그래서 다들 땀을 줄줄 흘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연달아 터널을 지나는 버스 안에서 창문을 열어야 하나 닫아야 하나 창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뗐다 반복해야 했다. 산 인근에 사는 사람은 여러모로 불편하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마지막 터널을 지나고 난 후에는 이젠 정말 열어도 되겠지 싶어 창문 쪽으로 다시 손을 뻗는데 뒷 자석의 창문이 먼저 열렸다. 뒷자석에 자리한 분 쪽으로 몸을 틀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유대감을 형성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야 했다.
더위가 해결되니 무료함이 덮쳐왔다. 가만히 음악을 들으면서 공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어느새 핸드폰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손 위에 올라가 있었으므로 난 이번에도 버티지 못하고 핸드폰 화면을 밝혔다. 그래도 남은 약간의 자제심은 인터넷 앱 위로 손가락이 올라가는 걸 막아섰다. 당장 온 세계의 인터넷에 출입 금지 팻말이 걸리면 가장 곤란할 사람은 아마 프로그래머일 것이다. 혹자는 '코딩은 인터넷이 한다'느니, '프로그래머는 구글링 하는 능력이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느니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하는데, 나는 그걸 들으면서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본질적으로는 맞는 말이었으므로. 나는 그렇게 뼛속까지 프로그래머였고, 인터넷 출입 금지는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자의적인 통제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출입 통제에 걸리자 머릿속은 컴파일 에러가 난 것처럼 온통 새빨간 경고 메시지를 띄웠다. 손가락은 인공 지능 에러라도 걸린 것처럼 여러 어플들 사이를 배회했다. 결국 읽다 만 전자책이나 아무거나 하나 집어서 읽어야겠다 싶어 전자책 어플 위로 손가락을 옮겼다. 하지만 전자책 어플 바로 위까지 옮겨갔던 손가락은 곧장 선회해서 인터넷 어플 위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인터넷 어플은 순식간에 핸드폰 화면 점거에 성공하고 말았다.
이 급격한 선회에 대한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전자책 어플을 켜려는 순간 문득 내가 쓰는 전자책 어플이 세로 모드에서 여전히 두쪽 보기를 지원하지 않는지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모종의 이유로 내 핸드폰은 스크린이 두 개가 붙어 있는데(아마 이렇게만 말해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스크린을 펼친 상태는 세로 모드인데 이 전자책 어플은 가로 모드에서만 두쪽 보기를 지원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핸드폰은 책처럼 양쪽으로 쩍 갈라져 있는데 전혀 책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하는 전자책 어플이라니. 그 점을 전자책 플랫폼 쪽에 수차례 건의했으나, 검토해 보겠다는 말만 되돌아올 뿐 업데이트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 후로 한동안 종이책을 선호했고, 전자책을 봐도 그냥 e북 리더를 사용했기 때문에 어플이 여전히 세로 모드 두쪽 보기를 지원하지 않는지, 지원한다면 언제부터 지원하기 시작했는지 그런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서 인터넷을 켠 것이다. 물론 인터넷으로 검색할 시간에 어플을 켜서 세로 모드 두쪽 보기를 지원하는지 확인하면 되는 일이긴 했으므로 결국 핑계지만.
인터넷에는 여전히 세로 모드 두쪽 보기 관련한 글이 별로 없었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것도 20년의 글이었으니 아무래도 니즈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글 리스트를 쭉쭉 내리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기도 해보고 했지만 결국 세로 모드 두쪽 보기에 대한 니즈가 부족하다는 확신만 강해질 뿐이었다.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꽤 많은 사람들이 갤럭시 폴드를 사용하고 있을 텐데. 게다가 갤럭시 폴드야말로 세로 모드 두쪽 보기를 지원해야 가장 책의 뉘앙스를 살릴 수 있는 핸드폰일 텐데. 하지만 사람들은 갤럭시 폴드를 책처럼 사용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아직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구나 하는 심정으로 포기하려는 찰나였다. 눈에 띄는 제목을 한 글이 있어서 홀린듯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나는 시야가 탁 트이는 듯 했다. 그 글은 굉장히 독창적인 방법으로 '세로 모드 두쪽 보기'를 시연할 방도를 설명하고 있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어플을 '팝업 모드'로 띄워서 창 크기를 가로 모드 비율로 바꾸는 것. 그러면 어플은 핸드폰의 가로 세로 모드 유무와는 상관없이 그를 가로모드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팝업 모드를 아예 사용하지 않던 것도 아니고 심지어 제법 많이 활용하고 있었던 터라 얻어맞은 자리는 더 아팠다. 난 왜 이런 방법을 진즉 생각해내지 못한 거지?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전자책 어플을 팝업 모드로 전환한 후 적당한 크기로 조절해 보았다. 전자책 어플은.... 세로 모드에서 완벽하게 가로 모드로 구동되고 있었다. 두둥.. 하는 효과음이 절로 내 귓전을 때렸다.
창의적이지 못했다는 좌절의 감정보다는 이제 핸드폰으로 종이책 감성을 충분히 살려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즐거움의 감정이 더 컸다. 나는 신이 나서 여러 가지 책들의 텍스트를 순회하면서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일반적인 프로그래머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잖아? 문제가 발생하면 인터넷에서 적절한 솔루션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니까 나는 본래 내가 하던 일을 적절히 잘 수행한 셈이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에 젖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셈법 때문에 나의 문제 해결 능력이 쉽사리 발전하지 않는 거겠구나 싶어 그 즐거운 와중에도 입맛이 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