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커밋 #142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한번 생각난 건 계속 머릿속을 떠돌았다. 전에 문득 떠올랐던 '요시모토 바나나 - 키친'이라는 소설이 계속 어른거렸다. 중학생 때 뺀질나게 집어 들어서 몇몇 책장은 마치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처럼 책등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게 하기도 했던 그 소설. 집에서 가장 먼저 보는 곳이 주방인 여자와 섬세하진 않지만 친절하게 길러진 남자와 아빠였던 엄마가 나오는 그 소설. 그 주기가 짧은 적도 있고 긴 적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꼬박꼬박 읽던 그 소설. 그리고 그 주기는 어느 순간 하염없이 길어져서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엄청난 옛날이 되어 있었다. 이 소설은 이제 내 취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 정도로 길고 긴 주기였다. 그럼에도 과거의 기억은 그 책으로 나를 집요하게 몰아세웠다. 현실의 마음도 상당히 척박해져 있었던 탓에 나는 그 소설 쪽으로 쉽게 몰려갔다. 양치기 개가 양들의 방향을 노련하고 세심하게 조절해 나가는 것처럼 그 아름다웠던 취향의 기억도 나를 그렇게 다뤘다. 그러니까 결론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이 책을 또, 또다시 재구매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현물로도 몇 권이나 가졌던 책이지만, 결국 디지털로도 가지게 되었다.
몇 번을 다시 읽었던 책이었기 때문에 내용 상으로는 지금 읽는 부분의 다음 수순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왠지 빠르게 독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자 수도 그리 많지 않고.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역시나 빠른 독서는 아니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옛날과 달랐던 것이다. 우선 독서 방식부터. 옛날에는 뭐가 급한지 스프린터라도 되는 것처럼 빠르게 글을 독파하는 것에 안달이 나 있었다. 나만 그런 건지 보편적인 증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빨리 읽으면 읽을수록 디테일을, 특히 내용과 상관없는 미사여구들을 빼먹고 넘어가게 된다. 지금의 나는 문장 하나도 함부로 다루지 않고 읽어 내려가는 방식으로 독서법을 바꿔 체화한 터라 간혹 '어라 이런 문장이 있었던가' 싶은 것들을 몇 장에 한 번씩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제대로 읽지도 않던 문장에 줄을 긋는 기분은 정말 미묘했다.
그리고 현물 책과 전자책의 차이도 한몫했다. 이를테면 현물에서는 폰트나 글자크기, 문단의 길이와 형태 같은 것들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 전자책에는 그런 게 고정된 요소가 아니다. 읽는 기기와 환경과 독자의 취향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옛날과는 전혀 다른 책을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위치쯤에서는 그 글자가 나와야 하는데, 싶은 곳에 전혀 다른 글자가 튀어나오곤 했다. 마치 연출을 싹 갈아엎고 새롭게 리메이크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젠가 편집자의 일 중 하나가 폰트와 글자크기, 문단 간 간격을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 편집자를 거쳐 완전히 완성되는 책에 비해 전자책은 미완의 느낌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김연수 님의 에세이에서였나. 과연 그럴지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전의 취향이 결국 즐겁지 않은 경험으로 끝나면 어떡하지 고민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책은 재미있었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재미는, 이전에는 그냥 넘어갔던 내용의 디테일을 속속들이 짚어가며 내며 읽어 내려갔던 부분이다. 이 책의 첫 번째 단편, '키친'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중요 장면에서 특히 그랬다. 바로 미카게와 유이치가 함께 미카게의 옛날 집을 닦고 청소하는 꿈을 함께 꾸게 되는 부분. 여기서 유이치는 유행가를 흥얼거리고, 미카게는 어라 그 노래, 하며 2절 첫 소절을 좋아한다고 대답한다.
그릇을 씻고 있는데, 물소리에 섞여 유이치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달빛 그림자, 흔들리지 않도록
곶 어귀에 보트를 세웠다.
옛날 같았으면 그렇구나, 노래를 부르는구나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궁금해할 수 있는 마음가짐도, 궁금증을 해소할 간단한 도구도 모두 갖춰져 있었다. 나는 당장에 검색에 들어갔는데, 역시 번역이 된 가사와 가수 이름 만으로 한국어로는 정보도 없는 노래를 찾는 건 꽤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만큼 찾아냈을 때는 즐거웠지만.
나는 막 찾은 그 노래를 커다랗게 틀고, 선선한 밤공기가 왠지 그리워서 창문을 활짝 열고 '키친'의 마지막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