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커밋 #14
애인은 눈썹을 꿈틀대며 날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제스처임이 분명한데. 대체 뭘까. 나의 무엇이 애인의 심기를 거스른 걸까. 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제법 많이 길어서 치렁치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앞머리가 S자 컬을 찰랑거리며 이마 위로 솟았다가 다시 차륵, 밑으로 내려온다. 애인의 눈썹이 더욱 꿈틀거렸다.
오지은 님은 '익숙한 새벽 세시'라는 책에서 내가 지금 있는 세계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한 바가 있다.
그리고 나도 어느새 그 대륙에 도착해버렸다. ‘야 뭐 재미있는 거 없냐’의 세계.
나는 정확히 그 세계에 도달해 있다. 도대체 뭘 해야지 옛날에 느꼈던 그 새롭고 활기찬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사실 이런 건 답이 없다. 그냥 새로운 걸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사촌이 타투이스트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타투는 언젠가는 꼭 한번 해봐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판이 다 깔리면 도대체가 물러설 곳이 없다. 언젠가 두 돌이 다가오는 아이가 있는 친구 집에서 봤던, 색색깔의 사인펜으로 그려진 다채로운 명화가 가득 차 있는 스케치북을 꼭 그대로 옮겨놓은 게 아닌가 싶은 몸을 가지고 있는 동생은 무심하게 별 것 아니라고, 그냥 한 번 해보라고 했다. 나는 겁이 꽤 많기 때문에 수차례 되물었다.
"안 아파? 안 따가워? 관리하는 건? 오래 관리해야 되나?"
기어코 동생은 짜증으로 응답했고, 나는 입술을 꾹 닫았다.
결국 동생도 했는데 내가 못할 게 뭐 있겠는가 싶은 마음에 한 타투는 후끈따끔한 오른팔, 틈만 나면 비판텐을 발라야 하는 일 같은 번거로운 시간이 지나고 나니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옛날에 뭔가를 처음 했을 때의 그 통쾌하고 즐겁고 해방된 듯한 기분은 전혀 통과하지 않았는데, 그냥 만족스럽다. 그저 만족스러울 뿐. 예컨대 잔잔한 독립 영화라도 시청한 느낌이었다.
피어싱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어느 날, 나는 크게 결심했다. 좋아. 이번에는 피어싱이다. 사실 이것도 '동생도 했는데 내가 못할 게 뭐 있겠는가' 하는 생각의 반복이다. 동생은 터널 피어싱까지 거쳐온 피어싱 상급자니, 이번에도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마치 타투 때 겪었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오간다. 동생의 무심함, 나의 갖은 걱정, 동생의 짜증. 그런 쓸데없는 아웅다웅을 거치던 어느 날. 나는 홍대를 지나다가 애인에게 문득 '피어싱을 해야겠다!'하고 이야기하고, 애인은 '그래라-' 했다.
피어싱을 해서 후끈한 귓불이 된 나에게도 옛날의 그 불같은 열정은 없었다. 은색 바벨 피어싱이 덜렁거리는 게 괜히 신경 쓰여서 잠을 자면서도 천장을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했다, 뭐 그 정도의 불편함이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타투 때와 완전히 같은 결과. 그냥 만족스러울 따름이다.
하지만 경험은 잔잔하게 나를 변화시켰다. 언뜻언뜻 일상에서 만나는 새로운 타투와 피어싱들이 계속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들은 타투와 피어싱을 하기 이전의 나와는 관계없는 세계였다면, 이젠 나와 크게 밀접한 세계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이전과 다른 눈으로 그것들을 관찰하고 마음속에 스크랩하게 되었다. 참 이상하지. 옛날에는 분명 진도 8 이상의 지진이 휩쓸고 간 것과도 같은 그런 원인, 나의 세계가 바뀌는 것에 대한 당위성이라도 있었지, 대체 지금은 무슨 일이지.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나는 마치 어제까지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던 키오스크를, 갑자기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신난 노인과 같은 심정이었다.
과연,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건 어때, 하는 심정으로 머리를 길러 보았다. 굳이 원인을 꼽자면 애인이 간간히 이마를 깐 헤어스타일을 한 나의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도 동생이 먼저 지나간 길이기도 했고. 동생은 머리를 치렁치렁, 까진 아니지만 굉장히 길러서 앞머리를 귀에 꽂을 수도 있을 지경이다. 나는 이번만은 동생에게 칭얼거리지 않았는데, 이번 시술 집도인은 동생이니 동생에게 밉보일 짓을 하는 건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생은 헤어 디자이너로, 간간히 나의 머리를 손봐 주는 나의 전속 미용사이기도 했다.
머리카락이 적당히 자랄 정도의 일정 시간과 동생의 세심한 손길을 거친 내 머리는 동생만큼 치렁치렁해졌다. S컬이 꾹 눌렀다 떼면 소닉이라도 비용- 하는 사운드와 함께 튀어 오를 것만 같았다. 였다면 좋았을 테지만. 내 머리는 사실 치렁치렁 보다는 치이렁 치이렁에 가까웠다. 동생은 힘이 없는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형아는 머리카락이 얇아서 힘이 없다."
머리카락에 대한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의 이야기였지만, 나는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튼 이미지 변화는 성공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애인은 나의 사형 선고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암 판정이라도 받은 것처럼 바닥에 쓰러져서 통곡을 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수준의 눈빛을 나에게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애인은 나의 이마와 축 쳐져가는 머리카락 사이로 시선을 리드미컬하게 운전했다. 나의 웃음으로도 그 과속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청학동에서 왔어?"
애인은 그렇게 말하며 내 앞머리를 귀에 착 꽂아 넣는다. 앞머리가 시옷자로 고정된 나는 입에서 자동으로 천자문이 흘러나와도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 된다. 나는 급히 고개를 털어낸다.
그 눈길을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한 일이었다. 그 머리를 하고 몇 달이 지난 오늘, 동생은 자기 애인의 머리에 컬을 넣어주느라 분주했고, 내 애인은 또다시 눈썹과 시선으로 기어를 D로 옮기며 엔진에 예열을 넣기 시작했다. 얼른 동생에게 달려가서 머리를 자르라는 들리지 않는 클락션이 빵빵거렸고, 나는 귀를 틀어막다가 결국 흰색 깃발을 흔들고 말았다.
자기 애인의 머리를 끝마친 동생은 그래, 알았다며 머리를 어떻게 해줄까? 하고 물었다. 나와 나의 애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투블럭 울프 컷."
22. 01. 03